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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Feb 16. 2024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

<윤보인 ㅡ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

2023년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에 수록된 윤보인의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을 읽었다. 서평을 쓰려고 타이핑을 하다가 여기에 내가 뭘 더 보태면 그건 사족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는 쓸 수가 없었다. 세속적인 삶 속에서도 지난 시절 사랑의 추억을 잃지 않았던 주인공의 마음이 전해졌다고 할까.


젊은 시절 사귀었던 여인 은주, 그녀는 누구나 선호하는 곳인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살았다. 그 후 미국으로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주인공. 주인공은 성장 배경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 그녀가 살았던 그 현대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그의 현실은 꿈만큼이나 냉정하기만 했다.   


말년에 병을 얻어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와 그녀의 아들. 은주는 죽고 그녀를 위해 그녀의 아들에게 갭투자로 아파트를 사주기 위해 거제로 간다.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첫사랑의 기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순수함 또한 잃지 않았다. 원래 순수한 열정은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삶 속에서 더욱 빛나는 법이다. 나는 그런 그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수신인이 없는 그의 편지(어쩌면 독백에 가까운)를 길게 인용한 이유도 쓸쓸한 그의 뒷모습이 어쩌면 나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그의 독백을 길지만 인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나도 잠시 그가 된 것 같았으니까. 




미안하다, 은주야. 미국으로 가버린 네가 다시 돌아와 나와 같이 압구정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가끔 했다.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퇴근 후에 돌아온 나를, 가방을 받아줄 너를 상상했다. 사는 게 참 더럽게 힘든 일이야, 내가 투덜거릴 때, 음식 하는 거 귀찮은데 우리 배달시켜 먹을까, 서로에게 얘기하는 그런 밤을 상상했다.


주말이면 가까운 골프장에 가고, 휴가 때는 팔자 좋게 비즈니스석을 타고 스위스를 가는 상상을 했다. 너와 헤어진 이후 몇 명의 여자를 안으면서 앙갚음을 하려 했고, 그 와중에 감정이라는 게 오락가락해서 너를 찾았고, 만나기 위해 너의 아메리카로, 네가 있는 길은 다 쫓아다녔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나는 그 후에도 가끔 너의 음성을 떠올렸다.


"뭐어? 고아원에서 농사도 시켰다고? 일을 안 하면 밥도 안 줬다고? 아, 안쓰러워. 너 정말 그래. 아니, 우리 둘 다 참 그러네."


꼭 나만 불쌍했던 건 아니었다. 고아원에서 뒤지게 맞았지만 너와 함께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아이를 갖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나의 동선을, 세월을 헤아려주기를.


언젠가 이 모든 물건을 정리하게 되면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우선 네가 묻혀 있는 양평, 그 어느 산기슭에 올라가 잠시 머무를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내가 모르는 사이에, 타국에서 고단한 노동을 했을 너를, 고꾸라지는 삶을 버텼을 너를 생각할 뿐.


끼니를 굶어야 했던, 날밤을 새워가며 걱정했던 그 긴 시간 속에, 은주 네가 보여주었던 게 동정이 아니길, 그리고 지금 내가 너의 아들에게 보여주는 이 풍경이, 이 몸짓이 위선이 아니기를.


해가 뜨고 지는 그 자리, 우리가 결국 죽음 직전에 잠깐 조우했지만, 그 서글픔을 뒤로하고 나는 너와 함께했던 인생의 페이지를 덮으려 한다.


어느 그믐날의 기억. 스무 살 초반에 어느 벚꽃나무 아래에서 입 맞추던 그 기억을 뒤로한 채. 아직 압구정으로 가지 못하고, 어두워지는 해안가에 남아, 바람만 부는 지독히도 아름다운 거제에서, 지금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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