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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02. 2021

가는 세월을 견딜 수 없네

내남자 친구의결혼식/ 정현종, 견딜 수 없네

그제부터 이어진 비가 어제까지 계속돼서 그런지 9월 같지 않은 9월의 첫날이다.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니 오지 않기를 바랬는데 벌써 9월이 와버렸다.

아직 거리의 풍경은 여름이지만, 비가 멎으면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을 것 같다. 가을은 여름 내내 익었던 곡식을 거둬들이는 풍요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뭔가를 잃어버린 느낌부터 든다.

어느덧 시간은 나를 넘어섰지만, 나는 여전히 시간 안에 매여 있다. 어떤 때는 시간에 쫓겨서, 어떤 때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해서. 이렇게 허둥지둥하다가 어느 순간 인생의 9월이 올 것만 같다.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정현종 _ 견딜 수 없네>






시인의 탄식처럼 지나간 모든 흔적은 상흔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남는 건, 아프고 나를 힘들게 했던 그런 상처들일지도 모르겠다. 즐거웠던 시간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힘든 시간들만 차곡차곡 마음에 쌓였다.

가끔 예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곤 한다. 기분이 별로일 때 종종 쓰는 방법이다. 그제 올린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도 그랬고, 어제 잠이 오지 않아 다시 본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인 줄리안 포터 역의 줄리아 로버츠의 연기도 유쾌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남자 친구(그는 게이로 나온다)인 조지 도니스 역의 루퍼트 에버릿의 연기 또한 일품이다.

영국식 악센트에 프랑스 풍의 부드러운 음성을 섞어 놓은 듯한 조지, 그는 어찌나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지, 사랑했던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상심한 줄리안 포터를 위로하는 대목에서는, 아, 나도 저런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영화를 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지만, 그리고 잠시 시름을 더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미소 지을 수 있으니 나름 괜찮은 방법이다.

'그래 할 수 없잖아,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해. 그러니 어서 원상태로 돌려놓으라고.'라는 조지가 줄스에게 하는 말이 마치 나한테 하는 말 같다.

물론 스스로 그렇게 세뇌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뭐, 다 그러고 사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고 어떻게 버티겠는가. 그리고 언젠가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조언...

"잃어버린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 그러나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에 매달리다 보면 결국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내가 의미 있게 써야 할 시간, 내가 더 사랑해야 할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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