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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r 22. 2024

말을 하기도 그렇고 하지 않기도 그렇고

"연필을 입에 문 채 오래오래 생각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쓰고는 지워버릴까, 하지만 역시 이대로 지우지 않고 두는 편이 좋겠어, 하고 또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아아, 이제 뭐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이 문제겠지요. 사랑합니다, 이 말은, 말로 하면 어쩌면 이리도 뻔하고, 아니꼽고, 답답한 것인지, 나는 말을 증오합니다." 


<다자이 오사무 ㅡ 고전풍>




실패로 점철된 어려운 상황, 그 상황에선 말을 아끼기가 쉽지 않다. 마음속에 꾹 눌러 담아야 했던 수많은 사연들. 때로 원망도 하고 싶고 심지어 비난의 화살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는 생각 앞에 서면 불편한 감정은 속으로 잦아들며 무디어지고 만다. 


아마 저 글을 쓸 때 다자이 오사무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의 마음을 지우고 싶지만 잠시뿐 곧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사랑이든, 뭔가 나의 관심을 사로잡으면 그 후부턴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요즘 핫하다는 비트코인이나 주식투자도 마찬가지. 하루에도 몇 번씩 시세를 확인하다 보면 내 삶의 본류에서 벗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 하루 종일 그를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없어진다.   


한편 말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내 안에 있는 어떤 감정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오히려 빛을 잃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있는 뭔가를 끄집어내 형상화하는 것은 나름 중요하다. 가슴속에 응어리를 껴안고 사는 것은 불편하고 때로 한이 될 뿐만 아니라, 그나마 말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영영 흑암 속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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