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너에게 가닿을까. 언제쯤 목마름 없이 너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공백 여백 고백 방백. 네가 나의 눈을 태양이라고 불러준 이후로 나는 그늘에서 나왔지. 이후로 나는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마음을 읽는 연습을 했지.
어쩌다 우리는 소멸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너는 단 한 번도 똑같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고 나는 너에 대해 말하는 일에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이제니 시인의 시 <블랭크 하치>의 전문 중의 일부이다. '내가 기록하는 건 이미 사라진 너의 온기 체온이라는 말'에는 시인의 말처럼 어떤 슬픈 온도마저 느껴진다.
상실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마음이 아프다는 직설적인 표현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건 상대가 앞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고, 이미 떠났다면 그런 표현은 마음만 더 아프게 할 뿐이다. 따라서 시인처럼 상실감을 은유나 비유로 표현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덜 아픈 것은 아니겠지만.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가 더 증명되는, 마치 마음속에 한 장의 증명사진처럼 그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남았다.
내가 읽었던 시 원문에는 마침표도 문장의 구분도 없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단어와 이미지와 문장들을 읽다 보면, 모든 것은 사라지고 언젠가는 잊힌다는 그 냉혹한 현실만이 점점 더 명징하고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