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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08. 2021

사랑하면 불멸이 되는 거야

레마르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책 표지를 장식하는 사진이다. 사진 속 연인들은 곧 헤어질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사랑이 더 간절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위기의 순간에 빛이 난다. 진짜가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순간에 실패하고 만다. 눈앞에 닥친 절망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없는 기다림, 고통스러운 상황을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다. 시간 앞에서, 극한 상황 속에서 속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처음 느낌을 잃어버리고 감정이 식어버릴 수도 있다.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는 상대의 허물 앞에 스스로 무너지기도 한다.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었구나, 알았다면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을 텐데...' 이런 후회가 쌓이다 보면 어느덧 처음의 애틋함은 사라지고 만다.


'그냥' 좋다는 느낌으로 시작된 사랑이, 시간이 지나 처음 느낌이 퇴색하면 이런저런 이유들이 붙기 시작한다. 아마 상대의 허물과 부족함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이리라. 좋은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이렇게 시작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추상적이지만, 끝은 헤어져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점에서 보다 구체적이다.


언제나 구체적인 것이 추상적인 것을 이기는 법.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하나. 어쩌면 구체적인 이유를 대는 건, 그렇게 해야 헤어지겠다는 내 결심이 정당화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자기 합리화이다.


너 때문이라고,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상대 탓을 하지만 실은 자신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마음이 주된 이유이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없어,라고 말하지만, 영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그 영원함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왜 모를까. 영원을 경험할 수도 없는 인간이 영원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계절이 바뀌듯, 그렇게 인연도, 사랑도 끝나고 만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그의 책 <하드보일드 하드 럭>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에, 혹은 자기 의지로, 또 혹은 상대방의 의지로 헤어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계절이 바뀌듯, 만남의 시기가 끝나는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첫사랑이든, 결혼 생활이든, 왜 우리는 사랑에 실패하는가? 사랑이 시작될 때 가졌던 마음이나, 결혼 초기에 지녔던 열정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탓이 아닐까.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정말 사랑한 것일까. 혹시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내 마음을 더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과거의 그 사람을 좋아한 건 맞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에 관한 어떤 기억이나,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나의 어떤 심적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쉽게 끝날 수는 없다.


다 지난 일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사랑했던 사람을 잊고 긴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까. 망각은 인간의 본질이자 숙명적인 한계라고 해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항상 생각할 수는 없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언제까지나 외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에게 사랑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실은 좋아했던 순간의 감정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 아닌지. 추억조차 세월이 흐르면 미화되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불멸의 사랑도 분명히 있다. 작가는 <개선문>에서 주인공 라비크의 입을 빌려 사랑의 불멸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눈을 뜨면 봄이고, 잠들면 가을이야. 그리고 그동안 천 번의 겨울과 여름이 지나갔지. 그러니 우리가 깊이 사랑하면 우리는 영원이 되고 불멸이 되는 거야. 심장의 고동, 비와 바람처럼 되는 거지.”


언젠가 책을 읽기 전에 이 글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레마르크가 쓴 글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다시 읽으니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나왔다.


유한한 인간의 사랑이 영원이 되고 불멸이 될 수 있다니... 나는 이 문장 앞에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들에게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오히려 사랑이 공고해지고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에게는 사랑의 감정이 퇴색하는 계기가 되는 반면, 누구에게는 불멸의 감정으로 굳어지는 영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사랑까지 가야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한다는 말이 흔한 요즘, 전쟁과 함께 겪었던 그 불멸의 사랑에 대해 나는 오래오래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사진 속 연인들이 그런 사랑을 했으리라 믿고 있다. 세월과 상황을 극복하는 사랑도 분명히 있다는 것도...




그 순간부터 나는 푸른빛이었고 바다였고 

바다의 한때나마 꿈이었어. 

내 안을 충만하게 메운 그 따뜻한 느낌. 

나는 그게 사랑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어. 

나는 비로소 사랑에 빠진 거야.

그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첫사랑에 빠진 거야. 


<김연수 _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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