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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적 희열

by 서영수

몇 주 전, 논쟁적이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었다. 산문의 형식을 빌려 쓴 시 같은 소설, 따라서 이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내용이나 교훈보다는 장면 장면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나보코프의 미학적인 시선을 따라가야 한다. 나보코프는 시적인 산문을 쓰는 작가, 산문으로 시를 쓰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소설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수고도 없다.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자꾸 선정적이라는 세간의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장면에 담긴 주인공 험버트의 비뚤어진 욕망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을 살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를 사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나보코프는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롤리타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호기심, 감수성, 인정미, 황홀감 등)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그런 책은 흔치 않다."


<롤리타>에 대해 하도 논란이 많자, 저자가 직접 책 말미에 쓴 해명이다. 나보코프의 이 글을 읽고 소설을 읽었다면 소설을 다른 시선으로 읽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중에 한 명인 나보코프 그리고 그가 가장 아꼈다는 소설 <롤리타>를 한 번 읽었다고 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소아성애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주인공 험버트를 이해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대상에 치중하기보다는 그가 했던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그의 욕망에 대해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나보코프는 주인공 험버트의 입을 빌려 소설의 끝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소설을 읽다가 중간에 그만 읽으려고 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중간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일종의 오기심으로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바라보는 내 시선 그대로였다. 여운이 남아서일까.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이다. 읽을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소설에 필적하는 아름다운 소설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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