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풀이 26 (역·지 14)
1. 들어가는 글
오늘은 제헌절이다. 헌법 제3조를 이렇게 고치자.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 및 부속도서와 역사적으로 인정된 강역이다.
어린 시절, 집안 아저씨 한 분이 만주에 다녀왔다고 했다. 참 신기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외국은 동화책에 있는 곳이었고, 만주는 중공(中共)이라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반공 포스터에 (사람도 아닌) 이리, 늑대들이 사는 곳이 만주였다. 그리고 간도라는 곳이 있다고 했지만 여기가 어딘지 제대로 알려주는 곳이 없었다.
나중에 여러 번 중국과 만주에 가면서도 내가 이곳을 우리 역사와 지정학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은 나이가 한참 들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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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주가 어디지?
만주가 어디지? 간도는? 만주와 간도는 북한이 가로막고 있어 그런지 1992년 8월 중국(중공)과 수교하기 이전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대에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중공(中共)’이 중국(中國)으로, ‘자유중국’이 대만(臺灣)으로 바뀌면서, 만주·간도·연변이라고 부르는 지방의 동포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사정이 변한다.
만주가 어디지? 위키백과에서 옮긴다.
만주(滿洲, Manchuria)는 중국의 둥베이(東北) 지방을 외국에서 부르는 지명이다. 만주족이 발상하여 거주한 지역인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 진한 붉은색은 동북(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방이고, 조금 연한 부분은 내몽골 자치구 동부 지역, 가장 연한 부분은 외만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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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만주는?
만주는 역사 속에서 우리와 다른 민족(아니 광의로는 같은 민족일 수 있지만)이 지배하던 땅이다.
중국의 왕조 20여개 중 실제 한족(漢族)의 왕조는 별로 없다. 나머지는 비한족, 아니 우리 동이(東夷)계열의 왕조라고 해야 하나. 지금도 56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니 말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중에서 한족(漢族)은 주(周), 한(漢), 송(宋), 명(明)이고, 나머지는 상(商)(동이), 진(秦)(서융), 수(隋)-당(唐)(선비), 요(遼)(거란), 금(金)(여진), 원(元)(몽골), 청(淸)(여진-만주)라고 한다.
역사에서 너무 먼 옛날은 그만두더라도 고려와 대응하던 원나라는 몽골족, 조선과 대응하는 청나라는 여진 또는 만주족으로 한족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런데 만주는 역사 속에서 한족(漢族)의 영토는 아니었다. 청(淸)이 쇠퇴하고 1911년 신해혁명의 구호가 멸청흥한(滅淸興漢)이라는 점에서 보이듯이 만주는 분명하게 한족의 중국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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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주에 관한 책
만주에 관한 책을 찾아보면 우리쪽에서 쓴 게 없어 보인다. 내가 지금껏 찾아낸 책 3권은 모두 일본인과 중국인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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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91』
*쑹녠선 지음, 이지영·이원준 옮김, 너머북스, 2022
- 중국 연변 조선족 형성사
- “두만강 국경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가 태동했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_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원제: Making Borders in Modern East Asia: The Tumen River Demarcation, 1881-1919)는 전반부에서 수십 년에 걸친 두만강 경계 획정을 추적하고, 후반부에는 두만강 너머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과 토지를 두고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가 펼친 경쟁의 양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한 이후 1909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간도 협약으로 두만강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의 역사가 상세하게 복원된다. 두만강 경계 획정의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국경을 정하는 것’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책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이 일어났던 위험한 시기에 ‘간도’라는 변경에서 서로 경쟁했던 여러 국민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주목한다. 이 지대의 땅과 인민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중국의 변경 건설 사업을 촉진했다. 한국은 국가를 잃은 상황에서 간도를 민족 결집의 상징적 공간으로 삼았으며, 일본은 식민사업을 촉발했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후기 제국(late imperial)’의 단계에서 저자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근대’라고 명명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복잡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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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오카베 마키오 지음, 최혜주 옮김, 어문학사, 2009년
중국의 동북에 위치한 만주는 청일 ·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파시즘 체제 아래 침략전쟁을 수행하여 종당에는 대륙 진출이라는 거대한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조그마한 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본국과도 멀리 떨어진 중국 동북(만주)에서 그들이 실질적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본 관동군이 중국 동북(만주)에 만주국을 건국할 당시 외형상으로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집정하게 하고, 구 군벌의 군인과 관료를 기용하는 등 독립국의 모습을 취하게 했지만, 동북(만주)은 일본 영토에 물자, 노동력, 자원을 공급하는 생명선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 일본은 오로지 자국의 국내 산업에 자원을 공급하고,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소련에 대응한 군사기지를 만들고, 그 군사력을 지탱하는 경제적인 기반을 닦기 위해 만주국을 철저히 이용하고 침탈했던 것이다.
만주국은 일본의 다른 식민지 국가 지배형식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기형적인 형태를 가진 식민지 유형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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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윤대석 옮김, 책과함께, 2024년 2월
이 책의 서장 〈만주국에 대한 시선〉의 첫머리다.
일찍이 만주국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1932년 3월 1일 중국 동북지방에 홀연히 나타나, 1945년 8월 18일 황제 푸이(溥儀)의 퇴위 선언과 함께 졸연히 모습을 감춘 국가, 만주국. 그 생명은 겨우 13년 5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거기서 살았던 일본인에게는 오히려 국가의 종언이야말로 진정한 만주국 체험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련군의 침공, 본국 귀환, 혹은 시베리아 억류 – 생사를 넘나드는,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 처참함을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개개인은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던가, 그 자신은 만주국에 어떻게 관계해 왔던가 하는 물음을 되물으며 다양한 만주국상을 그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31쪽에서)
서장 ‘만주국에 대한 시선’에는 1. 만주국의 그림자 2. 괴뢰국가 만주국 3. 이상국가 만주국 4. 키메라로서의 만주국이 있었다.
제1장 일본이 살아날 유일한 길로서 관동군의 만몽영유론이 있었다. 조선은 내선일체 및 일선동조론으로 이미 일본화되었다고 보고, 만주는 몽골과 함께 영유(領有)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만몽(滿蒙)은 일본열도의 옆구리를 찌르듯 불쑥 튀어나와 있는 비수 같은 조선반도와 그 배후에 있는 만몽의 대지, 거기서 일본은 국가의 우명을 걸고 청일, 러일(책에는 일청, 일러라고 썼다)의 두 전쟁을 치렀고 어렵사리 승리를 거두었다. 만몽은 “10만의 생령(生靈), 20억의 국탕(國帑, 국고금) ”을 치르고 얻은, 없어서는 안 될 땅으로 간주되었고 그 개발과 경영은 “메이지 대제의 유업”을 잇는 국민적 사명으로까지 인식되었다. 그곳은 또한 조선합병 이래 일본과 국경을 접하는 접양지대로서 국방상의 요지이면서, 동시에 그 땅에 잠자고 있는 풍부한 천연자원은 일본의 경제적 발전을 약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만몽야말로 일본의 사활을 결정하는 특수지역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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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도 이야기
우리는 1909년에 간도를 빼앗겼다(청일 간도협약).
흔히 국가의 3요소로 국민·주권과 영토를 이야기한다. 국민(國民)은 한 나라의 구성원이고, 주권(主權)은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권리이며, 영토(領土)는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범위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부터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라고 정해 놓았다. 그 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아니라 ‘역사상 인정한 고유한 판도’로 되어 있었다. 「바른 역사」를 위하여 먼저 이 문제부터 살펴보자.
우리 헌법의 영토 조항은 남북통일과 중국이 한국을 대하는 시각에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불법) 합병하기 직전인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그때까지 우리 영토였던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앞서 1905년 고종황제가 승인하지 않아 국제법상 무효인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무효라는 뜻, 제2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는, 우리를 빼놓고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협약(이게 정식 조약인가?)이다.
이 협약은 도문강(圖們江, 두만강)을 한(韓)·청(淸)의 국경으로 정하여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데, 일제는 대가로 만주(안주-봉천)의 철도부설권 등을 청나라로부터 얻었다. 생각해 보자. 외교권을 빼앗고 위탁받은 영토를 슬그머니 타국에 넘기고 대가를 챙겼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남한, 북한)는 제대로 주장을 하지 않는다. 역사의식을 가진 민족인가?
요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국제 이슈지만, 불과 100여 년 전 땅을 빼앗기고도 멍청히 있는 우리들(남과 북)이 정상인가? 현재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의 2% 수준이다. 그러면서도 핵무기 운운하며 설치는 북한은 중국(중공)이 많이 지원하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세계 5위의 군사력을 가진 대한민국은 헌법에다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영토라며 정작 100여 년 전에 빼앗긴 간도를 제외해 놓고는 헌법을 고치려 들지도 않으니 한심하지 않나.
정부가 바뀔 때마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한다더니, 아직도 위안부·강제징용 문제에 멈추어 있으니 이도 그렇고, 식민사학·반도사학, 소중화(小中華)와 사대주의에 찌든 역사를 고치지 못하니 이것이 슬프다.
우리는 불과 100여 년 이전에도 넓은 대륙, 만주에 살던 대륙 민족이다. 일본이 비밀협약으로 청나라에 간도지역을 넘긴 일련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외교(?)인지 뭔지를 한다니 한심하지 않은가. 오늘이 제헌절이다, 헌법의 영토조항을 고치자.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 및 역사적으로 인정된 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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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옛 강역을 되찾자
2년전(2022년 7월)에 써둔 다물(多勿)에 대한 글이 있다. 우리 옛 강역을 되찾자는 내용의 글이다.
12화 다물(多勿)을 기억하는가, 이제 우리가 깨어나야 한다 (brunch.co.kr)
우리 옛 강역 중에서 확실한 곳이 간도라고 생각한다. 1909년까지도 간도는 분명하게 우리땅이었는데, 일본과 청(淸)의 농간으로 청에 귀속되었다. 다른 곳보다 먼저 우리는 간도를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 간도가 어디지? 네이버 지식백과를 그대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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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간도는 17세기,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동남부와 압록강·두만강 너머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국과 한국 간 분쟁하던 지역이다. 19세기 중반부터 만주에 사는 조선인이 미간지를 개발하고 정착하면서 분쟁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변두리였던 만주가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간도 문제는 국제 문제와 연동되었다.
1909년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으로 인해 간도는 중국으로 귀속되었다. 한일합방 후 민족운동가들은 1870년대부터 형성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시도하였고 이를 탄압하는 일제의 침략이 지속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간도[間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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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협약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 문제에서 러시아를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 분할 정책을 이용하여 영국과 미국에게 한반도에서 일본의 정치적 우월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무력으로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 정치를 실시하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청나라와의 간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무력을 이용하여 간도를 실질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1906년에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이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호하도록 통감부에 요청하자, 통감부는 1907년 간도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였다.
간도 파출소의 설치는 일본 정부가 간도 문제에 있어 종래 조선 정부가 취해 온 입장을 인정하여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승인하고 난 뒤의 조처였다. 그것은 일본 나름대로 대륙 침략의 세밀한 계산에서 나온 조처였다.
간도 파출소에서 편찬한 「한청국경문제의 연혁」이라는 문서에서 토문강은 쑹화강 상류로서 두만강과 관계가 없으며, 두만강이 결코 천연의 국경선일 수 없다고 여러 조항에 걸쳐 밝혔다. 또한 간도 파출소에 소장으로 취임한 일본 육군 중좌 사이토(齋藤季次郎)는 “간도는 한국 영토라 간주하고 행동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조선 통감부는 1909년에 청나라의 변무독판(邊務督辦) 오녹정(吳綠貞)에게 간도는 한국 영토의 일부임을 알리고,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대한 납세의 의무가 없음을 선포하였다.
비록, 일본이 간도를 우리나라의 소유로 인정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은 서로 달랐다. 즉, 일본은 그들의 지배권이 미치는 땅을 보다 넓게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고,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 한반도를 거점으로 하여 만주에 세력을 침투시키는 첫 단계로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도는 분명히 우리의 영토라고 조선 통감부가 공표하였다. 이를 청나라에 통첩한 일본은 1909년 9월 7일 돌연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두만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상류는 정계비를 지점으로 하여 석을수로 국경을 삼는다.
둘째, 용정촌 · 국자가(局子街) · 두도구(頭道溝) · 면초구(面草溝) 등 네 곳에 영사관이나 영사관 분관을 설치한다.
셋째, 청나라는 간도 지방에 한민족의 거주를 승준(承准)한다.
넷째, 간도 지방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권(法權) 관할 하에 두며, 납세와 행정상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
다섯째, 간도 거주 한국인의 재산은 청국인과 같이 보호되며, 선정된 장소를 통해 두만강을 출입할 수 있다.
여섯째, 일본은 길회선(吉會線)을 설치할 권리를 가진다.
일곱째, 가급적 속히 통감부 간도 파출소와 관계 관원을 철수하고 영사관을 설치한다.
간도협약으로 일본은 안봉철도(安奉鐵道)의 개설 문제, 푸순[撫順] · 옌타이[煙臺]의 탄광 문제, 잉커우지선[營口支線]의 철수 문제, 관외철도(關外鐵道)의 법고문(法庫門) 연장 문제 등 만주에서의 몇 가지를 교환하는 대신에 중국에 간도를 할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침략 야심에서 본다면 만주 지배를 위해 군사력을 만주 깊숙이 진주시켜, 마침내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였을 때 간도 지방도 다시 지배할 수 있다는 계산 아래 취해진 예정된 조처였다.
그러므로 간도협약은 당사자인 우리 정부를 배제한 채 벌어진 불법적인 우리 영토의 할양이었기에 이 협약은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국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1881년부터 야기되었던 간도 문제는 협약에 의해 일본이 간도를 불법적으로 할양하여 중국의 영토로 편입하면서 28년 만에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절차를 가지고 간도 귀속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간도[間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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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간도되찾기 운동본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간도되찾기 운동본부〉(www.gando.or.kr)를 찾았다.
이 단체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을 옮긴다.
간도를 되찾아야 하는 이유
(1) 우리 땅 간도는 민족, 건국의 발상지이다.
간도지역의 백두산·송화강·흑룡강 일대는 애초 우리 민족건국의 발상지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이 지역은 우리 민족 고조선·부여 이래로 재세이화(在世理化), 弘益人間의 건국이념을 실현시켰던 곳이다.
특히 영문 국명인 KOREA의 발원지인 고구려의 옛 도읍지가 서간도 지역에 있으며 발해 옛 도읍지는 북간도 지역에 있다. 특히, 이 지역 반만년의 역사 중 우리 민족이 3,352년을 지배하였지만, 한족(漢族)의 지배 기간은 5백년 정도에 불과하다.
(2) 고래로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간도지역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서 수천년간 점유해왔던 곳이며, 근대 조선과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 무인지대인 상태에서 우리 민족이 먼저 들어가 피땀 흘려 개간하였다.
- 만리장성 동쪽 끝과 잇닿는 심요지역은 한족(漢族)의 진입을 엄금한 바 있다.
- 1909년 청일간 소위 간도협약은 무효이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간도는 분쟁상태에 있다.
(간도협약의 근거인 을사조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협약도 원천적 무효이고 1952년 중일간 평화조약에서 ‘중일 양국은 1941년 12월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1909년에 체결한 간도협약 역시 무효이다.)
(3) 민족의 역사, 문화 및 동질성의 회복
간도 회복은 남북통일과 재중동포는 물론 재외동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의미한다. 반세기 이상의 남북분단은 모든 분야에서 이질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간도지역에 거주하는 재중동포들도 지금까지는 우리의 언어와 전통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지만 3·4세 후손들은 중국에 동화되어 민족의식이 조금씩 이완되어 가고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 중의 하나가 간도영유권 주장이다.
* 다음 글 ‘환단고기에서 환단신기’는 2024년 7월 24일 게재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