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본법 시행당시의 공문서 중 단기로 표시된 연대는 당해 단기연대에서 2333년을 감하여 이를 서력연대로 간주한다.
④연대 정정에 있어서는 공문서정정에 관한 타 법령의 규정에 불구하고 당해 공문서의 서식에 적합하도록 연대 정정인을 사용하여 정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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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헌법의 영토조항 개정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 외교권을 박탈하고(이 해 독도를 시마네현에 몰래 편입한다), 1909년에는 청(淸)과 ‘간도밀약’을 맺어 철도부설권을 받는 대가로 우리 땅 간도를 청에 넘겼다. 남의 땅을 주고 대가까지 받았으니 이걸 뭐라 해야 하나? 도둑놈 아니 날강도?
그런데 우리는 단기 4281년(서기 1948년) 제헌헌법에 영토조항(제4조)을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고 했는데(이때도 국회에서 논란이 있었다), 현행 헌법인 1987년 헌법(제10호 헌법)까지 조문 순서만 제3조로 변경한 채 그대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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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
전문(前文)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단기 4281년 7월 12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제4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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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기 4281년(서기 1948년) 제헌헌법에서부터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의하면서 간도를 제외해 놓았지만, 중국은 우리 역사인 옛 조선(고조선),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가 자기네 것이라는 동북공정을 하는데 대한민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니 이도 기막히다.
나는 헌법의 영토조항을 고쳐, ‘한반도와 부속도서’에 ‘역사적으로 인정된 강역’을 추가하자고 주장해 왔다.
헌법 제3조
(현행)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개정)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 및 부속도서와 역사적으로 인정된 강역이다.
사실 ‘한반도’라는 말 자체가 일제가 1870년대부터 정한론(征韓論)을 펴면서 만든 말이므로 우리는 쓰지 말아야 한다.
생각해 보자. 참 역사를 도외시한 채 역사·지리와 지정학을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일제강점과 미·소의 분단점령을 당하다가 우리 의사에 반하여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전쟁 후에도 아직도 서로 주적 운운하는 이상한 종족이 자기 강역조차 한반도라며, ‘한반도 지정학’이라고 운운하니 정신 나간 민족 아닌가.
나는 바른 역사(특히 한중일 근대사와 국제관계)와 남북통일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젊은 시절 한때 독일 연방경제기술부(BMWi)에서 2년간 독일 통일을 연구하였다. 2008년에 발간한 자전(自傳) 에세이 『무심천에서 과천까지』의 제3부 「나의 주장」에는 1. 중국의 동북공정과 우리의 대응방안 4. 우리 섬 독도와 이어도, 6. 독일 연방경제기술부의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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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사용설명서
이번에 마거릿 맥밀런의 『역사사용설명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권민 옮김, 공존, 2009/2019). 원제가 ‘The Uses and Abuses of History’니까 부제인 「인간은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고 악용하는가」가 맞는 번역이다.
새로 공부하는 기분으로 역사가 무언지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의 몇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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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리 모두가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몰랐다가 알아채는 사람처럼, 우리는 늘 평소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5쪽, 첫 문장)
우리는 역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역사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6쪽)
헨리 포드(Henry Ford)는 “역사는 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7쪽)
우리는 우리의 가치로 스스로를 도우려고 과거를 불러낸다. (35쪽)
역사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36쪽)
집단 기억은 과거보다는 현재와 더 관련이 깊다. 왜냐하면 집단 기억은 집단의 자기 인식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74쪽)
잃어버린 황금시대는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민족주의자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는 분열된 이탈리아 반도에 호소했다.
“통일은 예나 지금이나 이탈리아의 운명이다. 카이사르들의 군대와 교황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이미 두 번이나 실현된 시민 제일주의가 이제 이탈리아라는 국가의 국민들에 의해 세 번째로 실현될 운명이다.” (94~95쪽)
역사는 민족주의를 부채질한다. 역사는 집단 기억을 형성함으로써 민족의 생성에 일조한다. 민족의 위대한 업적을 함께 찬양하고 패배에 함께 슬퍼함으로써 민족을 지탱하고 육성한다. 역사가 과거로 많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일수록, 민족은 더 견고하고 영속적으로 보이고 그 민족의 주장도 더 그럴듯해 보인다. (121~122쪽)
(캐나다) 퀘벡 주의 주훈(州訓)은 “나는 기억한다(Je me souviens)”이다. 특히 프랑스어 사용자들은 정말 기억하지만 대개 선별적이다. 퀘벡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영어 사용자들의 캐나다에서 포위된 소수자로 계속 존재해왔음을 강조한다. (169쪽)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 말은 정치인 같은 부류가 잰체할 때마다 쉽게 내뱉는 격언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사실 역사 덕분에 우리는 과거에 문제가 된 갖가지 상황을 유용하게 떠올릴 수 있다. (216쪽)
역사는 신중하게 사용하면 대안을 얻을 수 있다. 또 현재에 제기해야 할 질문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잘못될 일에 대한 경고를 들을 수도 있다. (226쪽)
요컨대, 내가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이것이다. 역사를 사용하고 즐기되, 언제나 신중하게 다루어라. (249쪽,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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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 강역은 어디인가?
이번 글부터 역사를 사용하고 즐기면서 신중하게 다루려고 한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 그도 남북으로 갈린 남쪽의 반쪽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와 지정학의 범위는 어디인가?
『환단고기』의 삼성기(하)에서는 우리 예전 강역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라고 한다. 애국가의 무궁화 3천리가 아니라 이것보다 100배 이상 크다는 이야기다.
* 5만리×2만리 / 3천리×3천리 = 111배
황당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나도 전에는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다는 역사가 헨리 포드의 말처럼 ‘뻥’인 게 점점 드러나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책 몇 권을 들춰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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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다.
이 책은 ‘천문기록에 담긴 한국사의 수수께끼’라며 전 서울대, 현재 고등과학원 교수인 천문학자 박창범이 썼다 (김영사, 2002년). 지금부터 20여년 전 이 책을 서점에서 구입하고 나서 나는 황당함에 기가 찼다고 고백한다.
그는 일식과 오로라, 달과 혜성의 움직임, 유성과 운석의 낙하 등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에 역사의 흔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역사의 과학적 근거 아닌가? 지금껏 이런 책이 별로 없었다.
우리 역사서의 천문기록을 컴퓨터로 복원해 보니,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한대륙’ 동부에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중국대륙’이란 말도 틀렸다. 우리의 예전 강역이 거기에 있었으니 ‘한대륙’이라고 부르자). 일본의 역사서도 맞춰보니 그들의 자연 현상도 주로 대륙 남부(남중국에서 남지나 해상)에 있었다는데---
박 교수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한 나라와 사람과 시기가 전혀 다른 데도 그 안에 실린 자연현상들끼리는 서로 부합한다.(76쪽)’고 말한다. 정말 놀랄 만한 일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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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이라는 책이다.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윤대석 옮김, 책과함께, 2024년 2월). 책의 서평을 적는다.
‘만주국, 일제가 급조한 괴뢰국이었는가, 아니면 실패한 유토피아였는가.
“나는 만주국을 머리가 사자, 몸뚱이가 양, 꼬리가 용인 괴물 키메라로 상정해 보고자 한다. 사자는 관동군, 양은 천황제 국가, 용은 중국 황제 및 근대 중국에 각각 대비시키는데, 그 의미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가운데 명확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1932년에 중국 동북지방에서 건국되었다가 1945년에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패망과 함께 홀연히 자취를 감춘 나라 만주국. 만주국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만주국은 ‘일제가 세운 괴뢰국’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될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각자의 기대와 이상을 품고 이 국가의 건설에 투신하였다. 관동군, 제국주의자들, 국민당 정부와 대립한 중국의 실력자들, 마르크스주의자를 비롯한 지식인들, 마지막 황제 푸이까지 각자의 유토피아가 실현될 곳이 바로 만주국이었다. 순천안민(順天安民),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왕도낙토(王道樂土)가 실현될 이상국가, 그것이 바로 만주국의 건국이념이었다.
지은이는 이처럼 많은 이들이 각자 다양한 기대를 품고 만주국 건설에 참여하는 과정을 1~3장에 제시한 뒤 이러한 이상이 삽시간에 변질되고 바스러지는 과정을 4장에서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일본인 지식인의 표현으로 “서구의 제국주의 지배를 배제하고 아시아에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의 장”이었던 만주국은 일제의 ‘세계전쟁’ 야욕을 위한 병참기지, 영하 30도의 날씨에도 갓난아이를 벌거벗겨 키울 수밖에 없는 참혹한 약탈과 착취의 땅으로 전락해 갔다.
만주국은 우리의 현대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를 비롯해, 대동학원 출신의 최규하, 겐고쿠대학 출신의 강영훈, 민기식 등 만주국에 참여했던 식민지인들이 대한민국의 국민국가를 경영하는 주체가 되었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만주국의 무엇이 이들을 매료시켰는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만주국의 역사는 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만주국의 멸망 후 겐고쿠대학의 조선인 학생은 일본인 조교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고 한다. “선생님, 조선이 일본의 예속에서 해방되고 독립해서야 비로소 한국과 일본은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패망하여 후퇴해 가는 일제에게 뼈아픈 충고인 동시에 오늘날 세계 시민의 입장에서도 새겨들을 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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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중국과 일본』이다. 이 책은 우리 한국을 무시하고 있다.
‘동아시아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라는 에즈라 보걸이 2019년 이 책을 썼다. (우리말 번역은 김규태, 2021년에 까치에서 펴냈다).
책에는「1,500년의 중일관계의 역사를 직시하다」라는 부제가 있고, 책의 목차를 보면 ‘제4장 조선을 둘러싼 대립과 청일전쟁, 1882-1895년’이 있을뿐, 우리에 대한 내용이 매우 적다.
긴 역사 속에서 한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과 중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 중 어느 쪽이 컸을까? 당연히 가까운 우리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조선 때부터 예전 역사를 조작한 끝에 제3자인 미국인의 동아시아사에서 우리가 조그맣게 짜붙어 있다.
이 책의 기술이 대개 이렇다. 40~41쪽을 소개한다.
‘600년부터 838년까지의 기간에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문물 - 문자언어, 불교, 유교, 문학, 음악, 건축, 즉 일본 문화의 기본 구성요소들 – 은 19세기와 20세기에 서구 문화가 유입된 후에도 존속되었다. 이 문화 요소들은 중국군의 진격이나 대규모 이주를 통하여 전해진 것이 아니라, 주로 다양한 중국의 문화 요소들을 익히고 일본으로 건너간 소수의 한국인들, 일본을 찾은 그보다 더 적은 수의 중국인들, 그리고 장안에서 유학한 소수의 일본 승려들과 관리들을 통해서 들어왔다. 이 승려들과 관리들 중 일부는 수년간 중국에 머무르며 그곳의 문물을 익혔다. 중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의 범위를 생각하면 그 광범한 문물 수입이 이토록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놀랍다.’
기막히지 않나. 이걸 어쩌나?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우리가 역사를 바로 잡지 않는 사이에 고대부터 일본이 한국에서 직접 또는 한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영향받은 게 아니라 중국-일본이 직거래했다는데도, 우리 역사학자들은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