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상해(上海)에서 ‘장부출가생불환’을 느꼈다

by 신윤수

이번 일요일(5월 11일) 윤봉길 의사를 만났다.


불과 25세의 나이로 1932년에 상해 홍커우(虹口)공원의 별이 된 사나이.

그의 도시락 폭탄이 폭발하여 일본 군부에 준 함성이 느껴졌다.


최근 얼핏 지나간 책 중 『테러리스트 김구』란 것이 있었다.

우리가 숭상하는 김구 선생이 테러리스트라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그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인물,

그는 중화민국 정부를 따라 임시정부를 1940년 중경부터 이끌었다.


그때는 우리의 투쟁방법이 일본 군부의 세력 앞에 폭탄을 던지는 방법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던진 윤봉길은 2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던 사실,

그는 아들들에게 당부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고

사나이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는 폭탄을 투척했다. 이 의거로 인해 일본의 고위 관리들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는 일제의 심장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사건으로, 전 세계에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존재감을 강렬히 알린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천만 민족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장부의 길이다."

윤 의사는 자신을 던져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 의지를 세계에 드러냈고, 이는 국제 사회로 하여금 일본의 만행과 조선의 상황에 주목하게 했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후 체포되어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고문과 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았다. 결국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처형되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민족의 정신적 승리를 상징했다.

그의 묘지는 1946년에 효창공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조국이 해방된 자리에 돌아온 것이다.

일본에 있었던 그의 유해가 새로운 희망을 안고 돌아왔다.


그의 호를 딴 매헌(梅軒)이라는 기념관이 상해 홍커우 공원에 있었다.


새삼스럽게 애국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새롭게 돌아온 그를 보며,

그처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런 사람, 저런 사람, 위원장?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