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한 집 걸러 커피집이다.
아파트 상가에도 카페가 있다. 눈에 띄는 것이 카페다.
그만큼 먹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다. 집 주변에 대학이 있다.
대학생들 손에는 항상 커피잔이 들려있다.
무슨 공식 같다. 최근 트렌드다.
난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즐겨 마시지 않는다. 그래도 커피는 마신다. 하루에 한 잔 정도다.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는 말은 어찌 보면 낭만과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 같이 느껴진다.
왜 그럴까. 커피잔과 탁자와 그녀가 떠오른다. 이런 풍경과 함께 앉아 있으면 주변 풍경마저 아름다워 보인다. 커피가 주는 향에 풍경이 취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커피잔을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그냥 이렇게만 써 놓고 봐도 한 편의 시다. 그냥 한 편의 그림이다.
그렇다면 그녀 탁자 앞에 놓여있는 커피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유럽 여행을 갔었다. 직장동료 4명이 함께 한 여행이었다. 유럽을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에스프레소 잔을 데미타세라고 부른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여행 당시엔 그 이름을 몰라서 우린 소주잔이라고 불렀다. 버스를 타고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휴게소를 들리게 된다. 휴게소에 들른 사람들 대부분은 데이블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그 소주잔을 앞에 놓고 커피를 마시는 유럽인을 상상해보라. 우아 그 자체다. 실제로 그 조그만 잔으로 커피를 음미하는 모습만으로도 너무 멋져 보였다. 그들은 그저 휴게소에 앉아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이겠지만 우리 눈엔 달라도 너무 다른 멋진 풍경이었다.
유렵 사람들은 대부분 잘 생겼다. 어렸을 때 본 인형처럼 생겼다. 대부분이 그렇다. 물론 뚱뚱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정말 다른 세계 사람이다. 동양인과는 사뭇 다르다. 내 기준 그리고 내 친구들 기준에서 볼 때 그들은 정말 멋지게 생겼다. 그 점에 우린 모두 합의가 된다. 하다못해 호텔 벨보이도 잘생겼다. 가끔 티브이에서 보면 유난히 뚱뚱한 유럽 사람들이 나오긴 하지만 실제 여행 다니면서 그런 사람은 거의 못 봤다. 다들 멋지게 잘생긴 사람들만 봤다. 우리는 그런 말을 밥 먹듯이 해가며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우린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못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친구들도 그렇다. 특히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 못 마신다. 휴게소에 갈 때마다 우린 다른 커피를 마시곤 했다. 에스프레소를 뺀 나머지 커피들을 마셨다. 오뚝한 코에 타미타세 잔을 앞에 둔 멋진 영국 신사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멋진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에스프레소는 나에게 쓰다. 정말 쓰다. 씁쓸한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커피를 주문하려고 긴 줄에 서있었다. 테이크 아웃 커피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말소리, 무엇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그 당시 나는 무얼 마실지 결정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툭 삐져나왔다. 에스프레소요. 나도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내 손에 소주잔이 들려져 있었다. 에스프레소다. 내가 시켰다. 그 커피를 손에 쥔 채 자리를 떠났다. 이걸 어쩐다? 방법은 없었다. 이미 값을 지불했다. 무를 수도 없었다. 한번 입에 대봤다. 쓴맛이 확 느껴졌다. 기가 막히게 쓴 맛이다. 유럽 사람들은 이런 걸 잘도 마시던데 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 커피, 먹지 못하고 그대로 버렸다. 아까운 돈만 날린 것이다. 힘들게 줄 서서 기다린 끝에 산 커피가 에스프레소라니, 그때 내가 왜 에스프레소란 말을 했는지 정말 모르겠다. 무심결에 나온 말이다. 무의식 중에 나온 말이다. 여행 갔을 때 느꼈던 감정이 에스프레소란 단어를 보는 순간에 확 되살아 났다.
커피를 즐기진 않지만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바리스타의 기본은 에스프레소다.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 등록하고 수업하는 첫날, 기가 막힌 우연이 일어났다. 커피 강사 이름이 내 첫사랑의 이름과 똑같다. 정말 더 기가 막힌 건 생긴 것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친군 그 친구가 아니다. 난 그걸 안다. 그런데도 이름과 모습이 비슷하다. 그 덕에 난 열심히 했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 커피도 전보다는 많이 마셨다. 물론 에스프레소 그대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원액에 뜨거운 물을 타서 흐릿하게 마시곤 했다. 바리스타의 기본은 에스프레소 맛보기다. 그러기 위해선 하루에도 몇 번씩 에스프레소 맛을 봐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에스프레소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전엔 그냥 버렸던 에스프레소가 조금씩 내 혀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첫사랑의 느낌만큼 쓴 커피, 에스프레소, 이렇게 써놓고 나니 그런데 첫사랑이 왜 쓰지?라는 반문이 생긴다. 쓰다는 느낌은 아닌데 내가 왜 그렇게 썼을까 생각해 본다. 커피 이야길 하다 보니 첫사랑도 그와 더불어 갑자기 쓴 맛이 첨가된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첫사랑의 맛이 커피 맛처럼 쓴 맛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어떤 것을 생각하다 보면 생각하는 대로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다 보면 그 말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염이 된다. 옆 사람이 하품하면 나도 하품을 하게 되듯 말이다.
우유 스트리밍, 난 이게 어려웠다. 에스프레소는 그런대로 할만했는데 우유 스트리밍이 난제였다. 거품이 잘 생기지 않았고 동그란 원을 만들어야 하는데 원이 자꾸만 찌그러지곤 했다. 거품도 안돼 동그라미도 안돼, 정말 답이 없었다. 자격증 시험에선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를 만들어야 한다. 카푸치노를 만들려면 우유 스트리밍은 필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필기는 실기를 배우기 전에 미리 따 놨었다. 필기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다. 문제집에 있는 것만 달달 외우면 그걸로 끝이다. 대부분 필기는 다 붙는다. 문제는 실기다. 우유 스트리밍도 그나마 좋아졌다고 말할 즈음에 실기를 치렀다. 한번 떨어지고 그다음에 됐는데 우유 스트리밍 때 거품이 제대로 생기지 않아 탈락했다. 심사위원이 자를 가져와서 거품의 센티를 쟀다. 잰 결과 거품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할 수없이 2차 도전에서 통과했다. 남들은 1차에 다들 되던데 별게 다 속 썩이네 하며 혀를 찼지만 안된 건 어쩔 수 없는 내 실력 때문이었다. 그렇게 바리스타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지금은 에스프레소를 맛볼 기회가 없다. 그렇다고 돈을 주고 사 먹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먹지도 못할 걸 알기에 사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를 마시진 않지만 그래도 커피 한 잔씩은 마신다. 하루에 한 잔 정도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모니터 앞으로 느긋한 향이 번진다. 커피 잔과 탁자와 그녀가 보인다. 글자가 한 글자씩 채워질 때마다 커피 입자들이 그 언어들을 흔들어 놓는다. 커피 잔 안에서 흔들리는 파문들, 점점 더 커지는 나선을 그리며 흩어진다. 그녀의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향기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