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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Jan 14. 2021

교수님

대학생

                                                           


나에게 교수와 대학생은 한 많은 단어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대학생, 하고 누가 날 불러주길 바랬다. 교수님, 하고 불러보고 싶었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보고 해보고 싶었다. 마흔이 넘도록 그 말은 나와는 무관했다. 동생들이 대학 다닐 때 늘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때는 나만 동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보다는 대학이 사회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했었다.  

  교수님, 이 말을 난 마흔 살에 해봤다. 대학을 가야 교수님이란 말을 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말이다. 그래서 난 두 번씩 반복해서 쓰곤 한다. 교수님, 교수님 이렇게 말이다. 그럴 때마다 교수님들은 그러지 말라고 한다. 교수님보다 선생님이란 말이 더 좋다고. 그리고 다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교수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늙은 학생이라 부담이 되셨나 보다.

강의실에선 항상 제일 앞에 앉았다. 뒤에 앉으면 불안했다. 눈알을 부라리며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몇 번 뒤로 밀린 적 있다. 남진우 교수님 강의 땐 젊은 친구들이 앞자리를 독차지했다. 평소엔 늘 뒤에서 듣던 친구들이 그 교수님 강의 시간은 아주 일찍 와서 자리를 턱 잡고 있곤 했다.

  첫 수업, 시 창작 시간이다. 긴 머리 교수님이 등장했다. 머리띠를 했다. 남자가 머리띠 한 건 처음 봤다. 이상했다. 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보통의 사고를 가졌다. 키도 작달막했다. 그런데 카리스마는 장난이 아니다. 풍기는 이미지가 강했다. 두꺼운 뿔테 안경에 멋진 서류 가방을 기대했다. 안경도 서류 가방도 없다. 대신 머리가 길고 머리띠가 있었다.  머리가 짧아서 머리띠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교수님이 그걸 하고 나타나신 것이다. 신기해서 자꾸 눈길이 갔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아니다. 물론 나도 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게 긴 머리와 머리띠일 뿐이다. 정말 신기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건 처음이다, 가끔 티브이에서나 볼법한 모습이다. 유별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래서 시인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낭만을 기대했다. 멋진 교수님을 기대했다.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기대는 기대에 그치고 말았다. 물론 여자만 머리를 기르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처음으로 머리가 긴 교수님을 만난 것이다. 실망은 거기까지다.

수업이 시작되자 카리스마가 폭발했다. 다부진 말투였다. 돈도 안 되는 시를 왜 배우려고 하냐? 지금이라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빨리 포기해라. 당장 교실을 나가라.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팠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귀를 기울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뿅 갔다. 달라 보였다.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멋져 보이기 시작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 같았다. 그보다 더 멋져 보였다. 나의 편견은 한순간에 깨졌다.

예술가답다. 아직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나에겐 너무나 멋진 말이었다. 앞으로의 여행이 기대되는 말이었다. 그 뒤로도 비슷한 말들이 이어졌다. 쓸데없는 것들을 배우는 너희들도 쓸데없는 사람들이다. 머 등등 이런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귀를 안 기울일 수 없는 말들이 난무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들을 폭탄처럼 퍼부었다. 우린 폭탄 맞은 사람들처럼 죽은 듯 강의를 들었다.  

  그 교수님은 특이하다. 남들과 다르다. 남들보다 눈에 잘 띈다. 그래서 학생들에겐 인기가 많았다. 많은 것들이 달라서였을까? 새롭다는 느낌이 드는 교수님이었다. 별난 느낌의 교수님이었다. 시 수업을 담당했다. 많은 것이 달랐다. 학생들을 보는 눈도 수업을 하는 방식도 달랐다. 난 교수님 수업방식이 좋았다. 이론만 하는 수업은 재미없다. 특히 머리가 녹슨 나 같은 사람한테는 말이다. 무엇이든 책으로만 하는 교수님들이 있다. 이론은 이론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론보다는 창작이 중요하던 시기였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론 수업이 어느 정도 끝났다. 본인이 쓴 시를 내라고 했다. 시를 몇 편 써보지 않은 상태였다. 시라기보다 그냥 끄적이던 잡글 정도였다.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작품 평을 했다. 예를 들어가며 합평을 했는데 그 예시가 내가 낸 시였다. 그 첫 시를 난 잊지 못한다. 의자라는 제목이었다. 전부다 기억나진 않지만 나의 시가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의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의 시였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엉망진창인 시였다.

  "자네는 다른 거 하지 말고 시를 쓰게" 수업이 끝난 후 나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평소에도 교수님은 나에게 자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 그 말이 익숙하다. 그때 그 말 때문에 난 시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땐 어느 것을 할지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시, 소설, 희곡, 동화 모든 걸 배우던 시절이었다. 어느 것이 나에게 맞는 것인지 다들 갈팡질팡 하던 시기였다. 나 또한 그랬다. 시를 배울 땐 시가 쓰고 싶고, 소설을 배울 땐 소설이 쓰고 싶어 졌다. 동화를 가르치던 교수님은 그 당시 연세가 가장 많았다. 우리끼린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동화는 동화대로 순수했다. 아마 그 당시 내가 동화를 선택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이미 속세에 찌든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시를 쓰기로 맘먹었다.

  나는 직장 다니며 공부를 해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론 그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정말 좋았다고 한다. 시간이 많던 학생들과 영화도 보러 가고 밥도 먹으러 다닌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여대라 그런지 교수님들과 학생들과의 파문은 수시로 학교 담 밖으로 새어 나왔다. 누가 누구랑 손을 잡았네 누가 누구랑 뽀뽀를 했대 별별 해괴한 소문이 난무했다. 스무 살 갓 넘은 파릇파릇한 청춘들이었다. 내가 봐도 예뼜다. 그러니 교수님들 눈에 얼마나 더 예뻤을까? 특히 학교 행사 때 그런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그 당시 우리 학교는 명동에 있었다. 행사가 끝나면 학교 근처나 명동 역 근처 술집으로 몰려가곤 했다.

  생전 처음 오바이트를 했다.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학교 행사가 끝나고 명동 근처 술집에서 술을 먹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난 술에 약하다. 지금은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는 그런 자리가 많았다. 다른 자리는 그냥 슬쩍 넘어가곤 했는데 그렇지 못한 날이 있다. 그 날은 교수님들이 나를 시험대에 올린 날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술을 마실 때 술을 말아서 마시곤 했다.

한 친구가 나서서 소주와 맥주를 섞어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차례대로 순서가 왔다. 그땐 술 잘 마시는 게 무슨 자랑거리라도 된 듯 마셔대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난 술에 약하다. 맥주 한잔만 먹어도 얼굴이 빨개진다. 그렇게 술을 거부하곤 했는데 거부하지 못할 상황이 생겼다. 교수님이 나보고 "너 그 술 안 먹으면 학점 없다"라는 말 정말 무서웠다. 할 수없이 누군가가 말아 놓은 술을 마셨다. 딱 한 잔 마셨다. 그렇게 한 잔을 마시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자는 안주빨이라는 말이 있다. 그때부터 난 안주를 계속 먹었다. 그렇게 하면 술이 깨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 안주를 먹어댔다. 그러나 술이 깨기는커녕 얼굴은 더 달아올랐다. 옆에선 그야말로 부어라 마셔라 하고들 있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슬쩍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그렇게 술집 주변을 30분 돌아다녔다. 술을 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런 후에 다시 들어갔다. 얼마 후 파장을 하고 난 집으로 가는 전철에 올랐다. 그 후에 다른 친구들은 2차 3차까지 갔었다는 이야길 나중에 들었다. 명동 역에서 전철을 탔다. 그때까지도 내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늦은 시간대라 얼큰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빨개진 얼굴로 서 있기가 정말 창피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인천행은 여전히 빈자리가 없었다. 술 먹은 뒤라 속이 답답해서 문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나마 바람을 쐬면 좀 나으려나 해서다. 그런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푹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않았다. 옆에 서있던 사람이 괜찮으시냐며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속으론 정말 창피했다.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렇게 쓰러진 것이 술 때문이라고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 내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드디어 역에 도착했다. 찬 바람을 쐬자마자 취기가 더 올라왔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역 벤치에 앉자마자 오바이트를 했다. 화장실까지 가려고 했으나 도저히 갈 수 없었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나로선 별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창피했지만 미안했지만 그대로 그 역을 나왔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속이 편해졌다. 화장실 가서 입을 헹구고 집으로 갔다. 정말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나에겐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 날 이후론 더 이상 술을 입에 대지 못했다. 그런 자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리에 참석만 하고 술잔은 드는 척만 했다. 그렇게 술과 나와의 인연은 멀어졌다. 그나마 그날 사건으로 학점은 겨우 받았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학점이란 말에는 벌벌 떨던 시절이었다.

  술로 말하자면 그 교수님은 고주망태였다. 술에 관한 소문이 많았다. 난 술자리에 자주 가진 않았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친구들이 늘 했던 말이다. 예전 시인들은 술을 참 좋아했다. 술과 여자, 다 좋아했다. 그 교수님도 예외는 아니다. 왼쪽엔 술, 오른쪽엔 여자 할 정도로 늘 붙어 다니는 수식어였다. 남들이 그렇게 본다는 걸 본인도 알고 계신다. 교수님과의 인연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이어졌다. 계속 나는 시 공부를 했다.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시집도 냈다. 그러나 공부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 개인적으로 교수님에게 시 공부를 더 했다. 나에게 시인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교수님이다. 남들이 술꾼이라 말하건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건 상관없다.

  그래도 나를 대할 때는 교수님으로 시인으로 선배 시인으로 깍듯하게 대해 주신다. 그거로 난 족하다. 남들의 시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교수님과 같이 다니다 보면 별 해괴한 소리를 듣는다. 한 번은 교수님과 출판사에 갔었을 때의 일이다. 대뜸 나를 보며 한다는 말이 술을 잘 먹게 생겼는데 언제 술 한잔 하자며 농이 건너온다. 어찌 보면 교수님과 함께 있으니 너도 그럴 거라는 편견에서 하는 말이다. 누구랑 한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편견은 편견일 뿐이다. 그런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그래도 여전히 그 교수님은 나에게 영원한 교수님이다.

  어느 날, 교수님이 나에게 이 정돈 꼭 읽어보라며 메일을 주셨다. 꼭 읽어봐야 할 것, 100가지였다. 거기엔 책과 영화, 희곡, 음악 등 각 분야의 책들이었다. 참고로 그 교수님은 독서광이다. 키도 작고 해서 젊었을 때 공부밖에 할 게 없었다고 한다. 정말 많은 책을 읽었고 지금도 여전히 많이 읽으신다고 한다. 그 덕에 나도 책을 사거나 빌려서 많이 읽었다. 다 교수님 덕분이다. 좋은 점이 많으신 분이다.

  퇴직하고 몇 달 후, 교수님을 뵈었다. 이젠 나도 늙었고 교수님도 늙었다. 그렇지만 교수님을 만나면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학생이던 시절로 말이다. 여전히 난 교수님, 교수님 부른다. 아직도 교수님이냐 하며 손사래를 치신다. 그러나 한번 교수님은 영원한 나의 교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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