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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Feb 01. 2021

보름달

  


평소엔 하늘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 볼 기회가 거의 없다. 서너 달에 한번 볼까 말 까다. 안 본다고 큰일이 생기진 않는다. 일부러 '하늘 한번 봐야지' 이런 일도 별로 없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마음은 이미 삭막해진 지 오래다. 하늘과 삭막의 관계는? 잘 모른다. 개연성은 없어 보인다. 하늘에 나의 감정을 기대어 본 것뿐이다. 언제나 볼 수 있는 하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산다. 풍경에 관심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른 저녁을 먹었다. 마트로 장을 보러 간다. 냉장고가 텅 비었다. 채워야 한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나의 최애 장바구니는 배낭이다. 손에 드는 것은 불편하다. 터벅터벅 길을 걷는다. 신호등을 건넌다. 양철 바리케이드가 길게 이어져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텅 비었다. 잠시 시간이 멈췄다. 과거가 몇 개 헐렸다. 미래가 땅 속에 들어 있다. 머지않아 고층 빌딩이 들어설 것이다. 네온사인들은 말이 없다. 거리로 저녁이 내려앉는다. 커피집엔 손님이 한 명도 없다. 빈 의자만 앉아 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린다. 어둠을 질주한다. 마트에 도착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 미묘하다. 커피집과는 전혀 다르다. 온도차가 심하다. 하긴 나도 그 온도차에 한몫했다. 의무적으로 물건을 집는다. 카트에 넣는다. 계산을 하고 거리로 나온다. 아까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간다. 8시다. 어둠이 더 까매졌다. 묵묵히 걷는다. 등이 무겁다. 벤치를 보자 쉬고 싶다. 벤치에 앉았다. 자연스레 고개를 든다. 하늘을 쳐다본다. 각도는 15도 정도다. 하늘이 내게로 왔다. 아니 내가 하늘로 갔다. 몸이 가벼워진다. 온몸이 포근해진다. 보름달이다. 보름달 꽃이 활짝 피었다. 보름달 빵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얼룩무늬를 감싸 안고 있다. 옥토끼가 얼룩얼룩 방아를 찧고 있나 보다. 떡은 구불구불할 것이다. 옥토끼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건물들이 일렬로 줄 맞춰 서 있다. 사열 준비를 마친 병사 같다. 가로등은 깃발 든 병사다.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이다. 내가 저렇게 동그란 보름달을 언제 보았나? 생각해 본다. 본 적이 없다. 오늘 이후 당분간은 또 못 볼 것이다. 보름달은 부족함이 없다. 나도 부족함이 없었으면 좋겠다. 동그라미가 꽉 찼다. 꽉 찬 사람이면 좋겠다. 삶이 꽉 차 있다. 인생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다. 세월에 부족함이 없다. 말이 필요 없다. 더 이상의 무엇도 필요 없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다. 그러다가 이내 마음을 비운다. 한편을 덜어낸다. 완벽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도 사람이라면 빈 구석이 있어야지, 안 그래? 맞아, 그래야 누군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혼자 원맨쇼를 하고 있다. 나와 하늘과 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마음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둥둥 떠올라 달에게로 간다. 생각이 달에 갇힌다. 뭉클뭉클 뭉그적뭉그적. 침묵이 찾아온다. 보름달은 단순 명료하다. 하늘에서 떠밀려온 파도 같다. 나는 파도 앞에 서 있다. 온몸으로 파도를 맞는다. 찰싹찰싹 따귀를 때린다. 신선한 충격이다. 이 곳까지 오려고 쉬지 않고 달렸을 것이다. 넘실넘실거렸을 것이다. 먼 길을 돌아왔을 것이다.

오늘은 운이 좋다. 보름달로 흥건하게 젖은 하루다. 달멍을 하고 나니 머리가 산뜻하다. 점점 감성이 메말라 간다.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런 찰나에 하늘이 나에게 드리워졌다. 보름달 속으로 들어간다. 나와 하늘과 보름달과의 멋진 데이트다. 둥그런 머릿속에 보름달을 담아 온다.

아뿔싸,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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