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이 좋아요. 향만 좋아요. 저녁노을 같아요. 은은하게 주변을 옥죄어 오는 그런 느낌이 좋아요. 누군가를 그 향으로 가둘 수 있다면 행복 그 자체죠. 혹시 모를 일이죠. 어쩌면 그 향은 이런 능력이 있을 거예요. 꽃 병에 꽂혀 아직 꽃을 피워내지 못한 몽우리를 활짝 꽃으로 피워낼지도 몰라요. 저기 먼발치에서 나를 향해 기차의 기적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지도 몰라요. 그 기차를 타면 이상한 나라로 인도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요. 말랑말랑한 포도알을 한 알 따서 입에 넣고는 오물거리는 느낌도 들어요. 번진다는 말, 스민다는 말, 너무 멋져요. 누군가에게로 가서 넘어진다는 거잖아요.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의 온몸을 누군가에게 희생한다는 말이기도 해요. 이른 아침 강가에 가 본 적 있나요? 어스름한 아침을 깨고 희미하게 번지는 아지랑이처럼, 희끄무레하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본 적 있나요? 자신의 온몸으로 강가의 물을 휘돌아 감으며 돌아 나오는 그 황홀에 빠져 본 적 있나요? 시선 앞에 머무는 것이 분명히 있어요. 약간 애매하고 흐릿하지만 건너온다는 느낌은 드는 그런 것들 말이에요. 가로등이 뿌옇게 빛을 발하며 물방울을 머금고 있고 나무들도 어릿어릿 물빛에 기대어 있는 모습은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에요. 알게 모르게 번져오는 향기 같은 것들이 있어요. 그런 광경은 정말 혼자 보기 싫어요.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광경이죠. 혼자라 생각하면 너무 외로워요. 갑자기 눈물이 동글동글 맺혀요. 그래서 사람들은 같이 사나 봐요. 서로 어우러져 있잖아요. 사람도 믹스 커피도. 지금부터 믹스커피를 C라고 부를 거예요. C는 혼자가 아니에요.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 그 옆에 또 한 사람이 있어요. 3명이 서로 섞여 있어요. 이런 경우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세 쌍둥이라고 불러야 하나?' 잘 모르겠어요. '쌍둥이? 말도 안 돼 그건 아니죠' 그냥 한 집에 세명이 산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C에 사는 사람들은 성격도 맛도 생김새도 달라요. 하긴 그래야 세상이죠. 똑같이 생기거나 성격이 같거나 맛도 똑같다고 생각하면 재미없어요. 살 맛이 안나죠.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에서 우리는 '같은 점이 어디 없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찾아보고 살피는 법이거든요. 그러다가 의견이 맞지 않으면 싸우기도 하면서 말이죠. 솔직히 난 믹스커피는 싫어해요. 전에는 믹스 커피만 먹었어요. 어느 순간 그게 너무 달다고 느껴졌어요. 살찐 사람에겐 설탕이 안 좋아요. 그래서 멀리 하기로 맘먹었어요. 그렇다고 단 걸 안 먹는 건 아니에요. 엄청 좋아해요. 당분은 기분을 좋게 만드는 요정이거든요. 가끔 요정을 부르기도 해요. 믹스 커피만 선호하는 사람 많아요. 내가 아는 사람도 한 사람 그런 사람 있어요. 까만 원두커피를 보면 '저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어' 이런 말을 하곤 해요. 난 믹스 커피를 자를 때마다 살인자가 되는 것 같아요. 누군가의 머리를 똑 따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간혹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미안한 나머지 한 가지를 생각했어요. 푹 찢은 목을 그 몸통 속에 다시 가지런히 넣어주는 것으로 용서를 빌곤 해요. 무서운 일이기도 하고 웃긴 일이기도 해요. 세상이 그래요. 무서운 일도 생기고 재미난 일도 생겨요. 서로가 자신이 주인인 양 굴면서 그렇게 살아요. 어떤 물건이든 누군가 사용하면 좋잖아요. 또 어떤 것은 먹어주면 좋고요. 비록 그것이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일일지라도 말이죠.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거잖아요. 얼마 전에 먹지 않고 쌓여만 있던 차 종류들을 버렸어요. 이 차는 달리는 차는 아니에요. '아, 그런데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 차는 중국에서 넘어왔어요, s라는 친구가 중국에 출장 갔다가 가지고 온 거거든요. 너무 오래 방치했어요. 그랬더니 온 몸이 굳어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길래 내린 결론이었어요. 아마 그 친구도 구석에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답답했을 거예요. 죽은 채 옴짝 달짝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구석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요. 분명 달달한 일은 아닐 거예요. 도깨비처럼 뿔이 돋아났을지도 몰라요. 자기를 먹어주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한참 토라져 있었을 거예요. 어쩌면 그에게 더 잘된 일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합리화하기로 해요. 그러지 않으면 더 슬퍼지거든요. C로 다시 돌아가요, 우리. 너무 멀리 왔어요. 자꾸 다른 사람들로 시선을 돌리지 말아요, 나만 봐요. 나에게 집중해주면 좋겠어요. 유혹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기에 안 좋아요. 하긴 c는 유혹하려고 태어난 것 같긴 해요. 향으로든 맛으로든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몸짓이니까요. 그래서 때깔 나는 황금빛 옷을 입었나 봐요. 왜 갑자기 황금이란 생각을 했을까요. 역시 우리는 비싼 것에 눈길이 가게 되어 있나 봐요. 실제 황금은 아니지만 황금빛을 띠고 있다는 것 하나에도 시선이 가다니! 물질만능주의에 길들여진 자신을 보다니! 참 어처구니없네요. 역시 나는 속물이라는 걸 인정한 셈이네요. 어쩔 수 없는 속물 인간으로 낙인찍혔네요. 할 수 없죠. 남에게 속물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거짓을 고하면 안 되니까요. 그렇게 좋아하는 액션을 취하다 보면 몸에 황금 냄새가 스며 들 지도 모르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사람마다 각자의 냄새가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서 나는 독특한 냄새가 있어요. 특히 y를 만날 때 그래요. y에겐 진한 장미향이 나요. 난 진한 건 좋아하지 않아요. 은은하면 좋겠는데 말이죠. 엘리베이터 안이었어요. y와 함께 탔다는 걸 향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예요. 사람마다 다 똑같을 순 없으니까요. 일부 사람들이 자꾸 코를 킁킁거려요. 이때 보면 사람이 아니라 개들 같아요. 무언가 냄새를 맡으려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눈동자가 되거든요. 그러다 한 두 명이 내리면 향이 더 진해져요. 그나마 사람이 많을 땐 향이 흐린 건 같았는데 분명히 내린 사람들이 일부의 향을 담아 갔을 텐데 말이죠. 향기의 본분은 그런 거잖아요. 주변으로 자신의 냄새를 퍼지게 하는 운명이잖아요. 향이 그래요, 내가 기분이 좋을 때는 진해도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런데 상사한테 기분 나쁜 소리를 들은 후라면 그 냄새가 기분 좋을 리 없죠. 아무리 좋은 냄새라도 기분에 따라 울적해질 수도 있거든요. 특히 그런 날에 진한 향으로 온몸을 덮칠 때면 상당히 짜증이 나곤 해요. 그렇다고 불평할 수도 없어요. 그건 개인 취향이니까요. 가끔은 그 향이 좋았을 때도 있었거든요. 울퉁불퉁한 담벼락을 견뎠을 그녀를 생각해봐요. 잔뜩 성 난 가시를 내세우며 겹겹이 쌓인 몸 안에 향을 감추고 웅크린 그녀를 발견하긴 너무 쉬운 일이죠.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하죠. 난 나 혼자로 살아가지 못해요. 온전한 자신이 되진 못하단 말이에요.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다시 또 누군가에게로 건너가는 것이 운명이에요. 운명을 거스를 순 없어요. 다들 운명에 순응하면 살고 있잖아요. 하긴 나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반박할 힘이 없네요. 향수에 관한 소설이 생각나요. 파트리크 쥐스킨드의 소설이었는데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봤어요. 특히 마지막 장면은 정말 서스펜스, 서프라이즈였어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향기가 잇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체취가 없다는 것을.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향기는 그 사람의 영혼이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자신이 처형되기 건 관중 앞에서 13명의 꽃다운 처녀들을 죽이고 나서 만든 기적의 향수를 뿌려요. 광장에 모인 수백 명의 관중들은 그 향에 매료돼요. 향에 취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게 되고 황홀의 경지에 이르지요. 그 광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정말 그런 향수가 이 세상에 있을까? 있다면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향수를 뿌리고 싶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황홀했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이나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죠? 그래서 y도 냄새를 몸에 가지고 다니나 봐요. 그녀도 아직 처녀거든요. 물론 영화 속 처녀들 나이는 조금 지난 듯하지만요. 다행이죠? 만약 그 나이였다면 혹시 또 모르죠. 그르누이가 살아 다시 나타난다면 살인을 제공할 처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그렇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네요.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당신은 지금 어떤 향기를 가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