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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Feb 26. 2021

마시멜로, 그 달달함을 위하여


  마시멜로, 발음하면 침이 고인다. 침은 액체다. 액체는 자유다. 자유는 움직인다. 움직인다는 것은 흐르는 것이다. 흐르는 것들은 다 생명이 있다. 살아 움직인다. 유기체다. 환경에 적응한다. 흐름을 따라 걷는다. 산길이다. 구불구불하다. 숲이 울창하다. 나무가 코 잔다. 나뭇잎들이 잠꼬대처럼 떨어진다. 저녁이 서쪽에 걸려있다. 하늘에 달이 떠 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귀가 쫑긋하다. 달님과 놀던 토끼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다. 어젯밤에 다리를 건너온 강아지들이 많다. 그들을 만나는 건 슬프다. 무지개처럼 일곱 마리다. 파란 맛으로 살다온 친구가 있다. 빨간 맛으로 살다온 친구도 있다. 그들은 각자 열심히 살아왔다.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건너온 것이다. 익숙지 않은 환경의 문을 들어 선 순간부터 모든 건 다시 또 새로운 시작이다. 힘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이 곳에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짧게 생을 마감한 친구가 많다. 세상의 흔적들이 조각조각 멍들어 있다. 


  나도 한 때 그런 적 있다. 달달한 맛이었다가, 크고 무서운 괴물이 되었다가, 예쁜 토끼가 된 적도 있다. 그때마다 살아가는 방법은 달라진다. 처한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게 인생일 것이다. 모든 것은 찰나다. 구름이 흐르고 안개가 내리고 허공이 흩어진다. 공중은 창백한 얼굴이다. 멀리서 종소리가 퍼진다. 누군가 버려놓은 휴지가 공원에 뒹군다. 마침내 떠나보내야 한다는 듯,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거라는 듯, 모든 것들이 소문을 달고 빨리 달린다. 이럴 땐 나만 느린 걸까?라는 의문이 든다. 왜라고 묻지 마라. 손톱도 물어뜯지 마라. 괜찮아 라고 되뇌며 계단을 오른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른다. 고개를 돌려보면 아무도 없다. 지나가는 바람이 나를 불러 세웠나? 흔적을 찾고 싶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계속 파고들어볼까?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언젠가 또다시 그런 말소리가 나에게 들릴 것을 믿는다. 떠나보내야 할 것들은 미련 없이 보내면 그뿐이다. 가득 담아 놓은 냉장고처럼 무언가를 자꾸 곁에 가두려 하지 마라.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냉동실 얼음처럼 된다. 꽁꽁 얼어붙어 떼려야 뗄 수 없을 수도 있다. 문이 열고 닫히듯 마음도 열고 닫힌다. 


  너무 푹신해서 가끔 잊어버리고 사는 게 많다. 뽀송뽀송한 시간은 축축한 시간을 건너간다. 옥상에 널어놓은 빨래를 보면 안다. 우산도 없이 집게를 부둥켜안고 서 있는 그 몸짓을 보라. 얼마나 고귀한가. 태양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그 본연의 자세를 기억하라. 계단은 자꾸만 내 앞에서 엎어진다. 뻗어나간 햇살은 돌아올 줄 모른다. 바람난 처녀처럼 온 동네를 떠돈다. 발정 난 강아치처럼 킁킁거린다. 그래 아직도 마음이 축축하니? 그때 내 몸에서 빠져나간 물은 시냇물로 흘러갔을 거야. 이렇고 말하곤 물고기를 상상한다. 우리 동네 근처에 조그만 물가가 있다. 그곳에 가면 송사리, 피라미가 산다. 물 밖은 바깥대로 물 안쪽은 안쪽대로 바쁘다. 헤엄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말갛던 흐리던 그 속에서 먹을 것을 찾는다. 아니 살 곳을 찾는다. 물가 옆에선 물풀이 수군거린다. 살짝 봄기운이 맴도는 요즘 강아지가 산책 나왔다. 옆에 걷던 아이가 엄마에게 저게 뭐냐고 묻는다. 강아지풀이야. 강아지가 종알종알 걷는 길 옆에서 강아지풀이 하느작하느작 바람결에 흔들린다. 그들은 서로 모른다. 단지 그 옆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서로 모르니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모른다는 사실로도 연결은 가능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리고 어느 곳 어느 장소에 있던 다 필요에 의해 그곳에서 자라는 것이다. 모두 다 소중하다. 강아지나 강아지 풀이나 마찬가지다. 


  머지않아 민들레도 꽃을 피울 것이다. 노란 꽃을 피우기 위해 지금 땅 속, 깊은 곳에서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땅 속만 그런 것은 아니다. 공중은 허공에서만 느끼는 스릴이 있다. 넘쳐흐른다는 표현이 좋다. 허공은 넓고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볼 수 있는 시야는 생각보다 좁다. 잠자리는 겹눈 속에 낱눈을 3만 개나 가지고 있다. 우리가 쓰는 핸드폰 카메라 기능은 잠자리의 겹눈을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수만 개의 잠자리가 우리를 찍고 있는 것이다. 잠자리는 수많은 눈으로 사방을 감시한다.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잡아먹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날아다닌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돈 벌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산다. 직장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모두 열심히 산다. 부릅뜬다는 표현은 솔직히 낭만적이지 않다. 표현 만이라도 낭만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사는 게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여유로운 냇가를 거니는 발걸음처럼 한가함이 가끔은 필요하다. 


  철컥 철컥 위아래~ 위아래~ 맞물리는 삶이란 얼마나 답답한지. 살아본 사람은 안다. 잘 나오던 수돗물이 갑자기 줄어들면 불안하다. 별것도 아닌데 조급하다. 물도 피곤에 찌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 삶에 지쳤나? 걱정이다. 세게 흐르고 쉽지 않은 마음이 한편에 깃들어 있을 때가 있다. 흘러가는 일에 강하다 약하다, 이런 말들은 필요 없다. 느리든 빠르든 흘러가는 본분에 집중하면 된다. '난 그렇게 생각해. 너무 빠른 것도 난 싫어 너무 단순해도 난 싫어' 유행가 가사는 삶의 진리를 깨우쳐 준다. 무거운 것들이 많다. 가벼운 것들도 많다. 얼마 전에 아주 무거운 택배가 왔다. 무겁다는 핑계로 들고 오지 않고 그냥 밖에 뒀다. 무겁다는 이유로 나에게 괄시를 받은 것이다. 그 물건 입장에선 서운했을 것이다. 내가 들것인가 말 것인가. 두 가지 생각으로 고민 중이었다. 벽에 붙은 스위치처럼 흑백론을 주장했다. 선택의 기로는 딱 두 가지다. 켤 것인가, 끌 것인가. 그러나 우린 스위치 같은 삶을 살진 않는다. 


  우리의 선택지는 최소한 두 개 이상이다. 선택지가 많아지면 오히려 더 헷갈릴 때가 있다. 없을 땐 없다고 투정, 많을 땐 많다고 투정 부린다. 눈부시게 환한 불빛 속에서 살다가 깜깜한 잠 속으로 빠진다. 그러다 창틈으로 새어드는 햇살에 무기력한 하루가  커튼으로 젖혀진다. 그렇게 하루는 시작된다. 시작이라는 말에 눈빛이 반짝인다. 기분 좋은 긴장이다. 긴장은 배뇨로 나타난다. 방광이 빵빵하다. 밖으로 나온다. 화장실은 벌써 누가 차지했다. 샤워기가 작동 중이다. 초조한 나머지 거실과 안방, 베란다를 세 바퀴째 돌고 있다. 다리가 꼬인다. 새어 나오기 직전이다. 급한 마음에 빨리 나오라고 소리친다. 긴장은 화장실 변기에 쏟아붓고 나서야 겨우 풀린다. 그제야 오늘의 식탁을 차린다. 


  마시멜로처럼 몽글몽글한 식탁이다. 그것은 요리의 장식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막대기에 꽂아 불에 구워 먹기도 한다. 입에 넣으면 폭신폭신하다. 이불처럼 따스하다. 온몸을 감싸 쥐는 달달함에 푹 빠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엘사가 만든 괴물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우리 가까이에 있다. 달달함 뒤에는 쓴 맛도 숨겨져 있다. 쓴맛이 있어야 달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시멜로가 토끼처럼 순해 보이다가도 괴물처럼 날카로워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숨어있는 행간을 찾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 행간은 기쁜 일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때론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상은 항상 상대적이다. 한편 에서 좋은 일은 다른 한편에선 나쁜 일이 되기도 한다. 더러 우리를 실험에 들게 한다. 우린 잠시 네 살 어린이로 돌아가서 시험에 든다. 


  마시멜로 실험이다. 접시에 마시멜로가 있다. 달달한 걸 앞에 놓고 주지 않는다. 15분을 기다리란다. 먹지 말란다. 그냥 눈요기만 하란다. 그런데 난 먹고 싶다. 먹지 않아야 한 개를 더 먹을 수 있다. 몇 명은 기다리고 몇 명은 마시멜로를 먹는다. 여기서 잠깐, 만일 그게 나라면 어찌했을까 생각해보자. 4살의 나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먹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 시절엔 마시멜로가 없었으니까 새롭고 낯선 것에 시선을 빼앗겼을 것이다. 당장 맛을 보고 싶었을 거다. 마시멜로를 입에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생전 맛보지 못한 천상의 맛이야. 세상에 이런 달콤함이 있다니 입에서 살살 녹다니 정말 기가 막힌 맛이야. 누가 이런 걸 다 만들었대 정말 칭찬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달나라 토끼나 먹어봤을 법한 맛이야. 구름처럼 몽실몽실 떠 다니는 맛이야. 무지개를 타고 날아다니는 맛이야. 


  실험시간 15분을 잘 기다린 4세 어린이는 지금쯤 아주 똑똑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보다는 두배쯤 현명한 사람이 되었을 거다. 지금 서 있는 위치도 다를까? 아파트 평수도 다를까? 고위직일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살랑살랑 흔든다. 그 꼬리를 물고 세상 한 바퀴 돌아보고 싶다. 그러다 도마뱀처럼 꼬리가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한 번쯤 4세 어린이가 되어보는 것도 좋다. 세상 물정 모르는 네 살 배기에게 벌써부터 세상을 가르치고 있다. 참아야 한다. 통제력이 키워야 한다. 그래야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과자를 하나 더 먹을 수 있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더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전략을 잘 짜서 참아야 한다. 나는 과연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끝끝내 기다릴 수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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