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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Mar 11. 2021

어린이를 모셔다 드려요

  

  아침 일찍 일어나 유치원 갈 준비를 해요. 저는 유치원에 다녀요. 나이 많은 유치원생 이거든요. 아이들에게 가기 전 목욕은 필수예요. 머리를 감고 깨끗하게 샤워를 합니다. 머리가 마르는 동안 도시락을 준비해요. 도시락은 몇십 년 만에 싸 보는 것 같아요. 언제 도시락을 쌌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해요. 손가락을 헤아려 봐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만큼 오래됐어요. 새삼스럽게 웬 도시락? 하겠지만 이래 봐도 보온도시락이거든요. 아이들 중고등학교 시절에 싸 주던 바로 그 도시락이에요. 도시락을 싸려고 하니 정말 반찬이 마땅한 게 없어요. 제 도시락을 쌀 때 엄마도 저처럼 고민을 많이 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선 냉장고를 뒤져요. 기본적으로 김치는 싸야 하고요. 뼈도 튼튼해지게 멸치도 한편에 넣고요. 콩이 몸에 좋대요. 콩자반도 옆에 끼워줘요. 밥은 냉동실에 얼려둔 밥을 전자레인지에 3분 돌려서 넣어요. 아침을 먹는 식구가 없어요. 그래서 아침은 안 하거든요. 이젠 국만 싸면 되는데요. 국을 싸가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싸가기로 해요. 어제저녁에 부대찌개를 해 먹었어요. 그게 조금 남아 있길래 그걸 쌌어요. 그러면 오늘 점심 도시락은 완성이에요.


  도시락을 싸면서 어린 시절에 먹던 도시락이 생각나요. 그땐 보온도시락은 없었어요. 노란 양은 도시락이었어요. 도시락을 싸가면 난로 위에 다들 올려놓곤 했어요. 잡곡을 넣어서 도시락을 싸오라고 권장했어요. 도시락 검사를 했어요. 혼식을 해왔는지 검사를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 도시락에서 콩을 빌려다가 자기 도시락에 심곤 했죠. 맨날 콩을 빌리러 다니는 친구도 있었고요. 매일 밥 위에 계란 프라이를 덮어 오는 친구도 있었어요. 그런 친구들은 부잣집 친구들이었어요. 제 도시락에도 계란 프라이는 없었거든요. 그 친구들이 부럽긴 했어요. 중학교 때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는 게 아니라 점심시간 한 시간 전부터 도시락을 먹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어요. 그러면 김치 냄새난다며 겨울에도 창문을 열어놓곤 했는데 우린 추워서 덜덜 떨기도 했어요. 가끔씩 난로에 쫀드기도 구워 먹곤 했는데 그때 그 쫀드기 맛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환상적인 맛이에요. 지금 아무리 맛있는 과자를 먹어도 그때 그 시절 그 맛은 나지 않아요. 시대가 주는 맛은 또 다른 맛이 나거든요. 그 시대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맛이 있어요. 도시락은 나를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매력이 있네요. 이 나이에 다시 도시락을 쌀 수 있다는 게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좀 귀찮긴 하지만 아이들과 같이 먹는다고 생각하면 신나는 일이 되거든요. 물론 도시락을 안 싸가고 사 먹을 수도 있지만 전 도시락을 싸가는 걸로 결정했거든요. 학생이 된 기분이라 나름 좋아요.


  도시락을 싸고 아침은 간단하게 먹어요. 베이글 하나 사과 반쪽, 그리고 우유 한 컵. 이렇게 뉴스를 보면서 먹어요. 뉴스에서는 오늘 날씨가 좋다고 하네요. 좋다는 말을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아져요. 아침 먹은 걸 얼른 치우고 양치해요. 요즘은 마스크를 쓴다는 핑계로 화장은 잘 안 해요. 기본적이 것만 바르면 끝이에요. 간단해진 것은 그거 하나 같아요. 화장을 많이 안 해도 된다는 것 하나요. 그런데 그것도 좋은 것은 아니에요. 따님이 화장품 회사를 다녀요. 코로나 바람에 화장품이 안 팔린다고 난리예요. 예전 같으면 중국, 일본 등 동남아 사람들이 여행 와서 가장 먼저 사가는 것이 국산 화장품이었는데 요즘은 하늘길이 막혔잖아요. 상점들이 폐업할 정도라고 하니까요. 그런 면에선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네요. 도시락을 백팩에 매고 가요. 걸음을 걸을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숟가락 통이 는데 움직일 때마다 그 친구도 같이 움직이나 봐요. 혼자 가는데 소리가 따라오니 심심하진 않아요. 친구를 데리고 가는 것 같아요. 내가 한 발자국 떼면 그 친구가 달그락, 또 한 발자국 떼면 달그락, 둘이 박자를 맞춰가며 걸어요.


  새 학기가 돼서 그런지 학생들이 많아요. 내가 가는 유치원은 병설 유치원이거든요. 초등학교랑 건물을 같이 써요. 그래서 초등학생들도 많고 유치원 학생들도 있어요. 실내화를 안 가져왔다며 울쌍인 초등학교 친구도, 밥을 안 먹고 왔다며 의자에 앉아 빵을 먹고 올라간다는 친구, 친구 기다리느라 교실에 올라가지 않고 벤치에 안자 기다리는 친구도 있어요. 친구랑 손잡고 오다가 넘어지는 친구도 있고요. 할머니 손 잡고 오다가 유치원 들어가기 싫다고 놀이터에서 노는 친구도 있어요. 초등학교 교실에선  유리창 너머로 아버지가 넘어오기도 하고요. 참새 노래 부르는 소리가 교실로 들어가기도 해요. 화단에는 이제 막 초록 초록한 잎사귀들이 움츠리고 있어요. 기지개를 펴기 직전이에요. 백 미터 달리기를 하려고 준비자세를 취하고 있네요. 오늘은 아저씨들이 화단에 예쁜 친구들을 심었어요. 초록색으로 보이는데 너무 멀어서 확실하게 보진 못했어요. 다음에 화단에 가면 어떤 친구인지 알아봐야겠어요. 


   난 이슬반 친구들이 오면 친구들 손을 잡고 교실까지 모셔다 드려요. 교실 앞에는 담임 선생님들이 계셔요. 안전하게 그곳까지 모셔다 드리는 일이 제 일이에요. 어제도 할머니 손 잡고 온 이수는 오늘도 제 손을 거부해요. 아직 쑥스러운가 봐요. 아니면 제가 싫은 걸까요? 힝, 전 안 그런데 언제쯤 이수가 제 손을 잡아 줄 날이 올까요? 기대하고 있어요. 할머니가 제 손 잡고 가라고 말을 해도 머리만 살랑살랑 흔들어요. 아직도 많이 부족한 가봐요. 제가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이수를 위해서 말이에요. 이수 외에도 몇몇 친구들은 날 거부해요. 그 친구들이 날 거부하지 않는 날이 금방 올 거라 믿어요. 아직 얼굴이 익숙지 않아서 그래요. 먼저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친구들이 더 많아요. 먼저 손 내밀고 잡아 주는 친구도 있거든요. 그럴 땐 신나서 두 손으로 꼭 잡아줘요. 따스한 온기를 나눠주고 싶어 져요. 친구들 오기 전에 손을 미리 문질러 놓고 있거든요. 저번에 내 손이 차가워서 민망했거든요. 친구들 손은 따듯한데 내 손이 차가우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미리미리 손을 비비고 있어요. 그러면 금세 따뜻해지거든요. 그러면 내 손을 잡는 친구들이 아주 좋아해요. 두 밤 자고 포항 간다며 자랑하는 별이는요. 할머니 할아버지 만나러 간다고 신났어요. 하나, 둘하나 둘 발걸음이 가벼워요. 그런데 왜 나도 신이 나는 걸까요. 난 포항도 안 가는데요. 아이들은 정말 순수해요.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정화가 돼요. 그동안 나쁘게 마음먹었던 일들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아이들 마음처럼 내 마음도 순수해져요. 말간 눈동자를 보면 마음이 순순해지지 않을 수 없어요.


  난 이곳에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솔~하고 올라가요. 그건 정말 높은 소리거든요. 평소에 내 목소린 저음이에요. 아마 레정도 될 거예요. 내가 살면서 솔톤으로 소리를 내어 본 적 있나? 생각해봤는데 그동안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보면 완전 자동이에요. 아마 솔톤으로 노래를 부르라고 해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직장 다닐 때 교육을 받으면 강사들이 솔톤을 강조하곤 했어요. 그러나 그건 교육 때뿐이었어요. 실제 생활에선 적용이 되지 않았거든요. 아이들과 솔솔솔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마음도 솔솔솔 올라가요. 솔솔 노래 부르면 주변에 꽃과 나무들도 따라서 노래 불러요. 메타세쿼이아 솔방울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요. 솔솔솔 굴러 다녀요. 나쁜 마음먹었던 것들은 이 친구들 보면서 아주 깨끗하게 씻어버려요. 아이들과 얼굴을 맞대는 순간 만이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순수하지 않지만 순수해지려고요. 따지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단순해지려고 노력 중이에요. 바로 내 눈앞에는 이슬처럼 영롱한 아이들이 또르륵 또르륵 굴러다니며 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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