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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Feb 27. 2021

날마다 집으로 출근한다



  사람들은 회사로 출근한다.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나도 예전엔 그랬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집에서 집으로 출근한다. 몇 발자국만 떼면 바로 직장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가 내 직장이다. 거리는 아주 효율적이다. 거리에 시간을 뺏기는 일 같은 건 용납하지 않는다. 상사 눈치 보는 일도  없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면 그만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 된다.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은 없다. 현재는 그렇다.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나도 모른다. 긴장은 덜하고 마음이 편하다. 마음이 편하니 시선도 말랑말랑해진다. 생각이 다양해진다. 시간이 여유롭다. 연필심처럼 진했던 마음이 사라진다. 생각이 연해진다. 틈이 생긴다. 틈은 좁거나 넓다. 좁은 틈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밤을 엮고 있을지 몰라. 넓은 틈 사이로 노을 한 뼘이 태양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안보다 밖을 선호했다. 밖으로만 나돈다고 할 정도로 외부 활동이 많았다. 개인적인 일이 많았다. 취미생활을 핑계 삼아 여러 가지를 섭렵했다. 기웃거릴 때마다 자격증이 하나씩 생겼다. 지금 와서 보니 쓸데도 없는 것들이다. 그 당시에는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서 배웠다.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한다. 불편해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줌으로 강의를 들은 적 있다. 참석 인원은 다섯 명이었다. 강사가 질문을 하면서 대답을 유도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 눈치 보느라 머뭇거리기 일쑤다. 난 그런 게 싫다. 어차피 할 거라면 얼른 해버린다. 가장 먼저 후다닥 손을 들고 답을 말한다. 그렇게 해야 속이 편하다. 가장 먼저 말하는 사람은 좋은 점이 많다. 남의 대답과 중복을 피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다. 그 비슷함에서 비켜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글 쓰러 카페로 간다. 집에선 글을 쓰지 않는다. 집에선 잘 써지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아는 친구도 카페에 간다. 아는 은사님도 그렇다. 한적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글을 쓴다. 나보고 집에만 있지 말란다. 제발 밖으로 나가라 한다. 특히 글 쓰는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되도록이면 밖에서 쓰라고 주문한다. 밖으로 나가야 사람도 만나고 사물도 많이 볼 수 있다. 무언가를 봐야 사유도 생길 거라고 말한다. 보는 만큼 느낄 거라고 말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이 있다. 반대로 말하면 모르는 것은 봐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제대로 알고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을 못 만나게 되면서 성격도 변하는 것 같다. 사회적 현상이니 어쩔 수 없다. 많은 일들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치부한다. 우리는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다. 섬도 아니고 무인도도 아닌데 자꾸만 성벽을 쌓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를 만든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마스크 쓰는 외부보다 마스크 벗는 내부가 편하다. 마음도 몸도 가볍다. 게을러지는 게 단점이다. 게으름을 피하기 위해 나도 카페에 간 적 있다. 적응이 잘 안된다. 글을 쓰지 못했다. 글도 글이지만 솔직히 난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 커피 맛을 잘 모른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다. 언젠가 필요할까? 싶어 따 놓았다. 커피를 즐기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카페를 가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맛있는 커피집을 찾아다니는 마니아들이 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그곳 찾아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난 시큰둥하다.  커피를 배우러 다니면서도 커피 맛을 잘 몰랐다. 그때 내가 겨우 느꼈던 것은 믹스 커피보다는 훨씬 맛이 깔끔하고 향이 좋다는 정도다. 커피에 문외한이다. 그러다 보니 카페와는 거리가 멀다. 마스크도 문제다. 마스크를 쓰면 입이 닫힌다. 말도 숨는다. 숨어 있는 글자를 찾아내는 일이 작가가 하는 일이다. 입을 막아야 하는 바깥은 싫다. 마스크를 쓰는 순간, 살짝 숨쉬기 어렵듯이 글자들도 그럴 것 같다. 자유로울 때 자연스러운 글도 나온다. 억지춘향은 재미없다. 


  전업작가들이 있다. 난 그동안 글 쓰는 것을 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요즘은 직업처럼 글을 쓰고 있다. 직업은 책임감이 필수다. 의무감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몇 년 전 일이다. 젊은 작가 최 모 씨의  사망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영화제에 수상한 경력도 있던 그녀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꽃다운 나이, 서른둘에. 난방 끊긴 월세방에서 그녀는 싸늘한 몸으로 굳어갔다. 남아 있는 쌀과 김치를 보내달라는 애원의 글을 문에 부쳤을 정도로 힘든 시절을 가난과 친구인양 보내고 있었다. 너무 가슴 시린 이야기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 현실이 어딘가에서 또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작가든 아니든 그런 사람들이 생길 확률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무섭다. 마음 아프다. 글을 쓴다는 것은 먹고 살기엔 부적합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퇴직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남는 게 시간밖에 없다는 말 실감 난다. 자연스레 글 쓸 시간이 많다. 컴퓨터에 앉아 있는 날이 많다. 어떤 날은 작정하고 의자에 앉는다. 글이 술술 잘 풀리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글은 휴지가 아니니 술술 잘 풀리지 않는다. 생각처럼 쉽진 않다. 억지로라도 쓰려고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도 글도 느슨해진다. 느슨한 생각으론 마무리가 되지 않는다. 글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간에. 난 대체적으로 장문을 쓰지 못한다. 소설은 정말 어렵다. 딱 한 번 써본 적 있다. a4 용지 열 장은 써야 소설이다. 그걸 간신히 채운적 있다. 그런 거 보면 난 마라톤을 하지 못할 것 같다. 그 긴 거리를 뛰어갈 자신이 없다. 그 이후론 시도해보지 않았다. 


  많은 시간을 어찌하지 못해서 글을 쓴다. 시간 죽이느라 쓴다. 글 쓰다 보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가 된다. 그게 좋다. 시간이 잘 간다. 그나마 이거라도 취미를 붙여 다행이다. 그 전에는 티브이만 열심히 봤다. 우선은 머리를 풀어헤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지쳤던 몸을 쉬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싶었다.  그러면서 인연의 고리를 차근차근 끊기로 했다.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작업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쉬다 보니 몇 달이 금방 지났다. 특별하게 한 일이 없어도 시간은 잘도 간다. 한 시간이 하루가 되고 하루가 한 달이 되는 건 금방이다. 처음엔 '하루가 왜 이리 길어' 짜증이 났다. 그런데 요즘은 하는 일도 없는데 시간은 잘도 돈다. 웃찾사의 노래처럼 빙글빙글 잘 돌아간다. 너무 잘 돌아가니 속상하다. 하루를 그냥 낭비한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최소한 하루에 한편씩 글을 쓰자. 다짐했다. 그렇게 조금씩 글을 쓴다. 쓰다 보니 글이 쌓인다. 눈사람처럼 사방으로 굴러 다닌다. 굴러가면서 눈도 만들고 코도 만들고 입도 만든다. 그러다 눈사람이 말을 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언젠가 두 팔 벌려 하늘은 안을지도 모른다. 꽁꽁 얼어붙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좋다.

  

  카페 문을 열듯 안방 문을 연다. 카페를 들어가듯 거실로 나온다. 분위기가 다르다. 카페 같으면 사람들이 들락날락할 것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은 없다. 아니지, 나갈 사람은 벌써 나갔다. 나를 반기는 것이 있다. 어제 내가 앉았던 책상과 의자 그리고 컴퓨터다. 아침을 간단하게 차린다. 베이글 하나와 사과 반쪽. 그리고 커피 한잔이다. 그거면 족하다. 원두를 갈아 만든 커피는 아니다. 그래도 나는 좋다. 아침으로 만족한다. 생각이 덜커덕거릴 때 커피 한 모금 마신다. 병아리가 물 한 모금 마시듯 햇볕 한 조각 쳐다보듯 말이다. 아 참 난 노트북이 싫다. 신세대가 아닌 것 분명하다. 아날로그 세대가 맞다. 특히 자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키보드는 역시 컴퓨터 키보드가 최고다. 난 거기에 길들어 있다. 직장이든 집이든 계속 그 자판만 써 왔다. 어쩌다 노트북으로 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익숙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감수하고 이겨내야 하는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편한 게 좋은 거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다. 불편한 것보다는 편한 것을 찾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카페에서 글 안 쓰는 이유가 노트북 때문일 수도 있다. 난 글 쓸 때 노트북으로 쓰지 않는다. 자주 쓰지 않으니 불편하고 불편하다 보니 멀리 하게 된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자연스레 노트북을 찾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카페와 맞지 않는다. 


  작업실을 가진 작가들이 많다. 난 작업실이 따로 없다. 한때 아파트 꼭대기층은 다락방을 만들어 놓는 곳이 있었다. 그런 곳이 있다면 그곳을 글방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그러나 그런 아파트를 구하진 못했다. 생각은 생각으로 그쳤다. 작업실이 있으면 좋겠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글만 쓰고 싶을 때도 있다. 작가들에게 글 쓸 공간을 대여해 주기도 한다. 그런 곳으로 가서 글만 쓰고 싶다. 모든 걸 다 팽개치고 가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그걸 거부한다. 가족이 있다. 예전에 그런데 가서  달 글 쓰다 오겠다고 했더니 다들 난리다. 꼭 그런 곳을 가야 글을 쓸 수 있는 거냐며 반박한다. 


  참 어렵다. 가족이 된다는 거, 같이 산다는 거 어려운 일이다. 내 맘대로 되는 건 없다. 조금씩 양보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것도 어렵다. 가끔 어긋나기도 한다. 글을 쓸 때만큼은 마음이 평온하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글만 쓰면 어떨까?'라고 생각해 본 적 있다. 그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대학 때 모 소설가의 특강을 들은 적 있다. 그 소설가는 미혼이었다. 왜 결혼을 안 하냐고 질문을 받자 대답했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할게요.  마장동 소와 관련된 소설을 쓰려면 그 근처에 방을 얻어 몇 달  살아요. 그런데 한국 남자들이 그런 걸 허락할 만한 위인들이 못 돼요. 그래서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요.'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정말 치열하게 글을 쓰는구나 감동받았다.  지금 내가 그런 생활을 동경하는 건 그런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그런 환경이 주어지면 그 환경을 벗어나려고 또 발악을 할 것이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상대가 없으면 발전이 없다. 가끔 그 상대가 시비를 걸어와서 문제다. 그 시비에 휘말리면 싸움이 된다. 싸움의 끝에 좋은 끝은 없다. 싸움은 방해꾼이다. 방해꾼이 자주 나타나면 피곤하다.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화해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길이다. 내일도 난 집으로 출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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