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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Feb 02. 2021

연년생 키우는 방법

 


  나의 딸과 아들은 연년생이다. 딸은 9월생, 아들은 그다음 해 8월생이다. 서른한 살에 결혼했다. 늦게 했다. 결혼하면 둘은 낳아야지 생각했었다. 신혼 때 피임을 하던 동료가 있었다. 신혼을 즐기기 위해서. 그 직원은 피임을 끊은 이후에 애를 갖느라 고생했다. 7년 만에 임신에 성공했다. 피임 후 아기 갖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난 옆에서 봤다. 난 피임을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첫 딸은 허니문 베이비다. 난 겨울에 결혼했다. 그다음 해 가을에 딸을 낳았다. 수유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남들처럼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았다. 직장 다니면서도 수유를 열심히 하는 동료가 있었다. 그 직원은 점심시간에 모유를 짜곤 했다. 모유를 병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퇴근 때 집에 가져가곤 했다. 여직원들이 많은 직장이라 별별 소문이 다 돈다. 그중에 모유가 펑펑 솟아난다는 소문은 특별했다. 집에서 모유를 먹어야 하는데 직장에 나와 있으니 젖은 퉁퉁 불고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그 동료에게 우린 늘 대단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부분의 우린 그렇게 못한 채 아기를 키웠다. 난 한 달도 못 먹였던 것 같다. 겨우 초유 정도 먹인 것 같다. 


  분만휴가 두 달은 금방 간다. 휴가라는 게 그렇다. 내가 휴가 중일 때는 짧고 남이 휴가 중일 때는 길어 보이는 게 휴가다. 난 건강한 체질이다. 동료직원들이 보증서처럼 말해주기도 한다. 아들은 퇴근하고 집에 갔다가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가서 낳았다. 딸은 아침 출근 준비하는데 진통이 느껴져서 병원으로 가서 낳았다. 낳기 직전까지 옹팡 지게 근무했다. 애를 낳기 전에 분만휴가를 받는 것보다는 애 낳고 나중에 받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 잘 견뎠던 것 같다. 견딜만했다. 남들처럼 입덧도 하지 않았고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덕분에 아이들은 작게 낳았다. 그게 또 신의 한 수였을 수도 있다. 동료들은 날보고 순풍순풍 애를 편하게 낳는다며 부러운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동료 한 명은 이박 삼일 입원해서 생고생을 한 끝에 힘든 수술을 하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난 힘든 축에 들지도 않는다. 친정 엄마도 입덧은 하지 않았다. 입덧은 친정 엄마를 닮는다고 한다. 내 손으로 미역국을 끓여 먹었다. 예전엔 조리원이 없었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으로 조리를 다한 거라고 쳤다. 그나마 신랑이 아이들 목욕시키는 걸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첫째 때 분만휴가는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그러나 둘째 때 분만휴가는 휴가가 아니다. 직장만 안 나간다 뿐이지 직장보다 더한 전쟁터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한 놈이 여기서 앵앵! 저쪽에서 또 한놈이 앵앵 운다. 한놈이 오줌을 싸서 기저귀를 갈면 또 한놈은 기저귀에 똥을 싼다. 기저귀를 갈다 보면 안다. 오줌을 싸서 기저귀를 갈아주면 곧바로 새 기저귀에 또 오줌을 싼다는 걸. 누구든 예외는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다. 우리 집 아이들도 그랬다. 기저귀 값도 비싼데 꼭 두장을 갈아야 한다. 오줌 싼 기저귀는 다시 채울 수도 없다. 가끔 기저귀가 아까워 그냥 채우면 민감한 엉덩이가 금방 알아챈다. 축축하다는 걸 금방 안다. 뽀송뽀송한 게 좋다는 걸 느낄 줄 아는 거다. 면기저귀와 일회용 기저귀를 번갈아 사용했다. 똥기저귀를 빨다 보면 안다. 샛노란 똥들이 얼마나 냄새가 지독한지? 샛노란 똥들이 또 얼마나 귀한지? 똥을 못싸서 응급실에 데려간 적이 많아서 똥이 귀하다는 걸 안다.   


  분만 휴가를 끝내고 출근했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돌본다. 돌 정도 지나 아이들은 놀이방에 취직시켰다. 시어머니 나이는 팔십이다. 거기다가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꼬부랑 할머니다. 아침은 전쟁의 서막이다. 동시 패션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한쪽에선 밥을 먹고 한쪽에선 기저귀를 간다. 밥을 먹네 안 먹네 큰소리가 반찬처럼 다양하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는 시어머니와 빨리 먹이고 출근해야 하는 나는 상대적이다. 두 아이들 도시락까지 싸고 나면 웬만한 건 끝난 상태다. 지금 놀이방은 식사가 제공된다. 그때만 해도 다들 도시락을 싸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랑이 좀 일찍 출근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덜 챙겨도 된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전쟁터를 보기 전에 전쟁터를 나간다. 대충 옷을 입고 핸드백을 맨다. 오른손에 아들, 왼손에 딸 손을 잡고 버스에 오른다. 놀이방은 직장 근처에 있다. 그 놀이방까지 데리고 가는 이유가 있다. 그 놀이방은 직장에서 비용을 대준다. 유치원 가기 전까지 준다. 우린 여직원들이 대부분인 직장이다. 많은 직원들에게 그 혜택은 돌아갔다. 힘들어도 그 놀이방에 맡긴다. 둘이라  비용도 만만치 않다. 좋은 혜택을 마다할 순 없다.


  에피소드가 많다. 일요일이나 토요일 당직근무도 했다. 평소 근무는 상관없는데 휴일근무가 문제였다. 휴일까지 봐주는 놀이방은 없다. 휴일에 당직이 걸리는 날은 머피의 법칙에 걸리는 날이다. 신랑은 직업상 지방 출장이 많다. 그런 날의 대부분은 지방에 있다. 연세 많은 시어머니가 두 아이들을 보기엔 무리다. 그런 경우 작은놈은 집에서 시어머니가 본다. 큰 놈은 내가 데리고 출근을 하곤 했다. 일요일 당직 근무 시에는 부서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데리고 출근한다. 눈치가 안 보인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솔직히 눈치 보인다. 그런 말 하기도 싫다. 하지만 데리고 출근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땐 할 수 없다. 서너 번 정도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부서 당직자는 나 혼자라는 거다. 아이는 다른 직원들이 보이지 않는 장소에 앉힌다. 가지고 놀만한 것들을 앞에 놔주고 꼭 거기에서만 있으라고 강조한다. 다행히 아이가 작아서 바깥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천만다행이다. 그런 날은 점심 먹으러 구내식당도 가지 못한다. 짜장면을 시켜 아이와 함께 먹거나 아니면 미리 점심 먹을 것을 싸오기도 한다. 직원들에게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모든 게 조심스럽다. 부서장에게 다른 직원들 눈에 띄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나마 잘 지나갔다. 부서장이 아량을 베풀어준 덕분이다. 이해심 넓은 부서장이었다.   


  우리는 토요일 근무도 있다. 12시 반까지 한다. 처음엔 수당도 없이 근무했다. 나중에 노조가 생기면서 토요근무를 하는 대신 평일날 4시간을 휴가로 쓴다. 아이들은 놀이방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나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아이들을 데리러 간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는 나른하다. 배도 부른 상태다. 양 손에 아이들을 잡고 버스에 오른다. 유리창으로 햇살이 넘실거린다. 졸음에 겨운 아이들은 참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존다. 직장에서 집까지 버스 정류장은 일곱 정류장 정도다. 아이들은 버스 안에서 존다. 내리기 한 정거장 전에 큰 놈을 깨운다. 큰 놈은 빨리 깬다. 작은놈이 문제다. 한참을 흔들어 깨워야 겨우 눈을 비빈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버스에서 내린다. 늦게 내린다고 기사님한테 야단맞은 적 많다. 가끔 나이트 근무도 한다. 밤 근무를 끝내고 집에 오면 정말 피곤하다. 그런데 두 아이들 때문에 잘 수가 없다. 더군다나 시어머니도 계신다. 밥도 챙겨야 한다. 졸린 눈은 시어머니와 아이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그저 졸릴 뿐이다.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자고 떼를 쓴다.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눈은 자꾸 감기고 아이들은 흐릿하다. 견디다 못한 난 아이들을 유모차에 팽개친 채 벤치에 길게 뻗는다. 금세 잠이 든다. 내가 그렇게 잠이 들면 위층 아줌마가 아이들을 봐주곤 한다. 우리 아이들을 정말 예뻐했다. 그 집 아이들은 우리 애들보다 서너 살 위다. 다 큰 셈이다. 정말 피곤한 하루하루였다. 오죽하면 내가 왜 저 얘들을 낳았을까? 후회가 될 때가 많았다. 너무 힘들다 싶을 땐 재들을  갖다 버릴까? 그런 생각을 마음속으로 한 적 있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겉으로 표현한 적은 없다. 소중하고 귀중한 아이들인데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나중에는 미안했다. 


  난 직장 동료들에게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유모차를 비롯해 옷, 책, 장난감도 물려받아서 썼다. 아나바다가 유행이었다. 아기용품은 잠깐만 쓰면 못쓰게 되는 물건들이 많다. 아기용품도 비싸다. 그런 물건들을 우리는 서로 물려주고 물려받으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런 것이 자연스러웠다. 부모가 돼서 그런 것도 못 사주네 사주네 그런 것을 넘어선 그 무엇이 있었다.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은 우리는 즐겼다. 나는 옷과 장난감 책들도 많이 물려받아 썼다. 아이들은 그게 누가 쓰던 것인지 안 쓰던 것인지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몇 개월 쓰지 않는 것에 큰돈을 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찾아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모든 것에 금방 싫증 낸다. 


  아이들은 많은 일에서 장벽이 되었다. 독일 장벽은 장벽도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커다랗고 높은 장벽이다. 쉽게 허물어지지도 않는다. 독일 장벽은 통일이 되면서 무너졌다. 아이들로 인해 생긴 장벽은 아이들이 크면 저절로 없어진다. 그때까지 참고 견뎌내는 길 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누가 그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제시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 때문에 다른 것들은 아예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포기된 상태라고 해야 맞다. 내가 산다는 것은 아이들이 산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직장에선 거의 하루 종일 서 있는 일이다. 티타임 때나 점심시간에 겨우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바쁘다. 직장은 직장대로 전쟁터다. 어떤 때는 점심시간에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갈 시간도 없어서 김밥으로 때우기도 한다. 퇴근할 즈음되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퇴근한다. 그때부터 집은 또 전쟁터가 된다. 저녁 준비를 한다. 반찬을 만들고 저녁을 먹는다. 곧바로 아이들 목욕을 시킨다. 한 놈 목욕시키는 사이 다른 한 놈은 저 쪽에서 똥 싸고 있다. 


  기저귀 값도 만만치 않다. 두 놈이라 구입할 때 아예 대량으로 구입한다. 지금처럼 쓰레기봉투에 넣었다면 봉투값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그나마 그땐 쓰레기봉투 값은 들지 않았던 것에 감사하다. 목욕을 시키고 나면 힘든 일은 대충 끝난다. 저녁 10시에 무조건 아이들을 재운다. 재우고 나면 아이들이 밤새 먹을 우유를 만든다. 우리 아이들은 먹성이 좋아도 너무 좋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우유를 먹는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있다. 우유를 타서 아이들 머리맡에 놓는다. 아이들이 자다가 칭얼거리면 우유병을 물려주고 다시 잠든다. 아이들은 우유를 다 먹고 병을 팽개치고 다시 잔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우유병을 수거하는 일이다. 다른 집 아이들은 잘 때는 우유를 안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집 애들은 달랐다. 그래서일까? 어려서부터 통통 그 자체였다. 성인이 된 아들 딸에게 어릴 적 사진을 보여준 적 있다. 딸은 자기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직장을 다녀서인지 아이들을 작게 낳았다. 딸은 3킬로, 아들은 2.6킬로였다. 그랬던 아이들이 너무 잘 먹어서 살이 붙었다. 남이 보기에 살쪘다 싶을 정도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정상 체중으로 됐다. 그 시절 사진들이 앨범에 들어있다. 가끔 그걸 들여다본다. 아이들은 자기 사진을 보고 '저게 나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한다. 아이들은 커 가면서 얼굴이 변한다. 특히나 어렸을 때 모습은 크면서 점차 없어진다. 그러니 둘 다 자기가 언제 저런 모습이었냐며 되묻곤 한다. 말 안 들을 때마다 '네가 저렇게 뚱뚱 했었어'라고 약 올리기도 한다. 


  연년생을 키운다는 건 전쟁터에 나가는 선봉장처럼 아주 힘든 일이다. 이때 아이 둘은 장군이 이끄는 수많은 병사들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연년생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장군감이라고 큰 소리로 말해주고 싶다. 표현이 너무 심했나? 솔직히 그만큼 힘들다. 그게 팩트다.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이다. '다른 엄마들은 학교에 매일 오는데 엄마는 왜 학교에 안 와, 직장 그만두면 안 돼?' 학교 끝나고 오면 매일 투정을 부리곤 했다. 비가 오는 날은 더 심하다. 아침에 비가 오면 우산을 들려 보내면 되지만 오후에 비가 오면 난감하다. 그렇다고 근무 중에 우산을 갔다 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이들은 결국 비를 쫄딱 맞고 집에 온다. 그런 날 저녁이면 직장을 그만둬야 하나 싶기도 하다. 이 또한 지나갔다. 고학년이 되니 딸도 직장 그만두라는 말을 덜 했다. 반장을 하든 부반장을 하든 본인이 알아서 했다. 그래도 나에게 주어진 배식당번은 반차를 내서라도 꼭 갔다. 내 휴가의 대부분은 아이들 배식당번으로 쓰였다.  


  힘들게 키운 만큼 보람도 크다. 두배로 힘든 만큼 기쁨도 두배다. 학교 다닐 때도 좋은 점이 많다. 서로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상의한다. 성별은 다르지만 공감대 형성은 가능하다. 같은 또래라서 이해력도 비슷하다. 나이차가 많은 아이들을 키우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거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다. 어렸을 땐 성별 구분 없이 쓸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남들은 말한다. 직장 다니면서 연년생을 어떻게 키웠냐고? 세상의 엄마들에게 못할 것은 없다. 엄마니까 가능하다. 어떤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다.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스스로 생긴다. 이 세상의 연년생을 키우는 엄마들은 정말 힘들 것이다. 그 수고를  안다. 얼마나 힘들지, 하루하루 지치고 피곤할 것이다. 나 때는, 지금과는 또 다르다.  더 힘들 것이다.  토닥토닥 위로의 손길을 보낸다. 그래요, 많이 힘들지요? 무슨 일이 생기면? 맞아요, 그런 일도 있네요. 함께 공감해 주고 싶다. 맞장구쳐 주고 싶다. 당신의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져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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