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에 관한 이야기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나쁜 습관 중 하나인데, 뭔가를 잃어버려서 기분이 좋아질 때도 가끔 있다. 사실, 최근에는 ‘잃어버림’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달라지기도 했다.
나의 건망증은 유전인 것 같다. 할머니의 할머니도 그러셨고 할머니도 그러셨고 엄마도 그러신다. 동생도, 나도. 그게 좋은 걸 수도 있고 좋지 않은 걸 수도 있는데 난 내 인생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억하느라 덜 중요한 부분을 쉽게 잊는 것 같다. 그러다가 가끔 진짜 중요한 걸 잊어서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어제는 밖에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으려고 책을 갖고 다니다가 택시에 놓고 내렸다. 그것도 산지 하루밖에 안 된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을! 근데 사실 기분이 좋다. 책을 잃어버렸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은 것 같다. 물론 나는 그 책을 정말 보고 싶었지만, 내가 잃어버린 책을 가지게 된 누군가가 주인에게 돌려주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 뒤 그 책을 읽게 된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나는 그 책을 또 사거나 빌려보면 된다. 그 사람은 인생에서 평생 볼 예정이 없었던 책을 몇 장이라도 펼쳐보지 않을까. 그것이 내가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책을 읽어버리는 것을 즐긴다.
그 책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 택시 아저씨가 읽으시든, 혹은 그분이 자신의 집에 가져가셔서 가족 중 누군가가 펼쳐보든, 그분의 동료가 보시든 아무튼 누구라도 그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좋겠다. 나도 누군가가 잃어버린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내 평생 그 순간이 아니고서는 읽을 생각을 차마 하지 못했을 책을. 그렇게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내 관심 밖의 세계와의 조우도 나쁘지 않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더 좋다.
그 책을 사게 된 계기도 특이하다. 그저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을 탔는데 집 가는 방향 반대로 타버려서 그대로 그냥 몇 정거장을 더 가서 삼성역에 내려서 코엑스에 가서 책을 보고 책을 좀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와 관련된 책을 찾으러 갔는데, 눈에 들어온 책은 어제 잃어버린 책이었다. 난 항상 나에게 정말 더 필요한 것들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에게 찾아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원래 찾으려던 책 보다 내 눈에 들어온 그 책이 내 인생에 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책을 도서관에서 읽다가 서점까지 가서 사게 되었고, 그 책을 잃어버렸다. 아마도 나보다 그 책이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을 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잃어버림도 참 기쁘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내 작은 한마디가 나의 소중한 사람을 잃게 할 수도, 나의 작은 선택이 중요한 일을 망치게 할 수도, 나의 작은 실수가 나를 너무도 자책하게 하는 하루하루들을 만들 수도 있지만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는 건망증이 심하지만, 건망증이 심한 만큼 내 인생에 큰 스트레스가 되는 일들까지도 잘 잊어서 더 행복할 수 있었으니 건망증도 축복이다.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있다. 내 실수가 다른 이에게 더 큰 축복이 되어 누군가 그 책의 한 구절을 읽고 더 행복한 삶을 사는 오늘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