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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Mar 13. 2019

무례가 웃으며 진실에게 말하는 방법

No thanks : 아니요 괜찮습니다. 됐거든요.

 요사이 글 쓰는 간격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 주변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저를 흔들어 놓습니다. 이제 겨울이 지나고 이번 주말에 겨울옷을 정리하려다가 오늘 아침 들이닥친 꽃샘추위에 다시 패딩을 꺼내 입었습니다. 잠잠하던 내 삶에도 봄이 오나 했는데, 다시 한번 겨울옷을 꺼내 입게 만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지지도 않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의 본심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40년을 넘게 살아온 나의 부모님도 아직까지 티격태격 다투시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목표가 아닐까 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보통의 경우 일 때문에 힘든 건 30% 정도 되고, 사람 때문에 힘든 건 70%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울고 웃기도 합니다.


 특별히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관계가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입니다. 나보다 어리지만 일찍 입사하면 선배가 되고,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함께 입사하면 동기가 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관계는 직속 상사와 “나”의 역학 함수입니다. 물론 직장동료 내에서 참기 힘든 존재가 있을 수도 있고, 나를 치근덕 거리는 이상한 중년 아재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갑 오브 갑은 직장상사와 나의 관계이지 않을까요? 저도 생각해보면 직속 직장상사와 원만하게 지낼 수 있으면, 직장생활이 견딜만했습니다. 계속되는 야근에도 함께 전우애도 느끼고, 술 한잔, 커피 한잔으로 서로를 달래기도 하고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상사와 부하로 대변되는 수직으로 맺어진 인간관계이다 보니, 예의가 생기게 됩니다. 사실 그 예의라 함은 군신유의, 장유유서로 대변되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의”입니다. 즉 갑이 을에게 강요하는, 을은 자연스레 익히게 되는 예의입니다. 윗사람이 따라주는 술잔은 무릎을 꿇고 받아야 하고, 두 손을 받들어 받고, 고개를 90도 이상 돌려서 마셔야 합니다. 윗사람에게 쓰는 메일과 보고서는 오탈자가 하나도 없어야 하고, 첫 문장에도 심혈을 기울어야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OO님,”이라고 쓸지 “OO님, 안녕하십니까!”라는 한 문장에도 예의를 가득 갖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의는 대략 무시됩니다. 아랫사람을 호칭 없이 OO야, OO 씨라고 부르는 건 위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보이는 친근감입니다. 보고서에 오탈자나 띄어 맞춤을 강조하시더니, 윗 분이 보내시는 메일이나 문자에는 아직도 “없읍니다.” “괜찬습니다.” 이런 표현이 간간히 보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점점 예의 뒤에 숨어버립니다. 말을 해봐야 변하지 않을 거란 무력감이 지배하게 됩니다. 대대장, 연대장이 제 아무리 이등병에게 소원수리를 받아도 군 내부반 생활이 변하지 않습니다.


 어제, 회식자리에서 “무례”하게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후배에게 OO이라고 부르고, 후배도 저에게 OO이라고 불렀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아는 형님” 컨셉 회식이었습니다. 제가 그 컨셉을 좋아하는 건 “예의” 뒤에 숨어진 “진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의”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너무도 “나”를 숨기고 “진실”을 숨깁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음에도, 예의상 커피를 마셔야 합니다. 제일 싫어하는 중국메뉴가 짜장면이지만, “짜장면으로 통일”이라는 말에 예의상 짜장면을 먹어야 합니다. 물론 예의상 커피나 짜장면 정도야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의”상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는 법입니다.


 때론 무례하게 웃으며 상대방에서 진실을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산행해야 하는 분위기에서도, “저는 개인 약속 때문에 참석이 어렵습니다.”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매번 그렇게 하면 조직생활에서 찍힐 수 있습니다. 적당히라는 표현을 저도 싫어하면서도 이럴 땐 쓸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의 근간을 흔드는 일을 무례하게 요구한다면 윗사람에게도 무례하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무례하다는 말은 다만 존칭이나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무례하다는 말은 예의를 갖추면서 “진실이나 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 우리는 서로 무례하게 웃고 즐기며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때론 나에게 쏟아지는 돌직구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시고 스스로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엔 그렇게 나에게 무례하게 예의를 갖추며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상대방을 노려보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좋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의 바보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무척이나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입니다. 저는 이 글 제목을 무례가 웃으며 진실에게 말하는 법이라고 정했습니다. 때론 진실을 듣기 위해서는 무례하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커피나 짜장면을 주시는 분들에게 웃으며 얘기합시다. No thanks. 아니요 괜찮습니다. (속으론 됐거든요) 그렇게 자꾸 No라고 자신을 표현해야 상대방도 나에게 예의를 갖추게 됩니다. 예의 뒤에 진실을 감추지 말고 노 땡쓰라고 외치는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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