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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Aug 26. 2019

40.9km 행복

불현듯 느낀 행복이라는 실체

 일요일 오후 2~3시가 되면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껌벅껌벅 눈이 감겼다 떠졌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직장동료가 일요일 오후만 되면 낮잠을 2시간 잔다는 말에 코웃음 치며, “OO아빠도 이제 늙었군. 늙었어!” 라고 핀잔을 줬는데 그 핀잔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하여 나 또한 여김없이 일요일 오후 2~3시에는 시계 태엽을 감듯이 나에게 낮잠이라는 주기적인 의식을 치르고 있다. 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빙빙 돌아다니는 사이에, 11살 아들은 두 눈에 힘을 주고 의식의 세계에서 영어 학원 숙제를 하고 있다. 아들의 의식과 나의 무의식이 싱크로되는 오후 4시에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러 밖을 나섰다.


 그러니깐 6살에 두 발 자전거를 탄 아들은 자전거 타기가 유일한 취미인 아비를 만나서 자전거에 빠져있다. 올해 4월에는 대구 영천 강변체육공원에서 대구 도동분기점까지 무려 왕복 100킬로를 탔다. 누군가는 아동학대라는 말을 했지만, 단순히 체력만을 비교하면 11살 아들이 이미 압승이다. 이제는 신발사이즈는 260mm에 이르러서 아들의 헌 신발을 내가 물려서 신게 되었다. 포항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와서, 포항 형산강 자전거 전용도로로 나섰다. 오랜만에 경주 양동마을 방향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내가 앞서서 컨보이를 하고, 아들은 내 자전거 속도 20km/hr 에 맞춰서 잘 따라온다. 여러 번 자전거를 타본 경험에 따르면, 10킬로 정도 타고 2~3분 쉬었다가 자전거를 타는 게 체력적으로 가장 견딜 만 했다.


 아들과 나는 경주 양동마을을 지나, 다산마을 초입까지 20km를 타고서야 반환점을 돌았다. 쉬는 시간에 물 한모금씩 하고, 특별할 것 없는 대화를 이어간다. “힘들지 않냐? 오랜 만에 자전거 타니깐 좋은 것 같다. 10월 쯤에 새 자전거를 사러 가자. 개학 했는데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지내느냐?” 등등 남자들끼리 대화라 주로 단답형으로 이루어진다. 아들은 머리부터 땀이 흘러 이미 얼굴에는 땀으로 범벅이다. 올해부터 아들의 땀냄새가 더이상 어린 아이의 그것이 아니다. 뭐랄까.. 수컷의 땀이라고 할까.. 약간 쉰내가 나는 땀냄새가 귀엽기도 하고 으젓하기도 하다.


 아들과 나는 다시 자전거를 돌려 세우고, 페달을 밟았다. 다시 30km 지점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아들이 햄버거를 먹고 싶다는 말에  집 근처 포항공대에 있는 버거X으로 향했다. 저녁시간이라 대학생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서 인지 대기줄이 제법 길었다. 아들이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난 버거 세트 2개와 아이스크림도 주문한다. 아내가 알면 잔소리를 들을 각이었지만, 남자 둘에게 이 정도 일탈은 애교로 봐줄만 하다. 아들과 함께 햄버거 2개를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니 세상 부럽지 않다. 땀을 흘리고 난 뒤 먹는 버거세트는 천국의 만찬이라 불릴 만 하다. 아들과 난 다시 자전거를 타고 마지막 오르막 길에 페달을 저었다.


 마지막 자전거 속도계에 찍힌 40.9km를 보며, 불현듯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햄버거 2개 세트와 아이스크림 가격은 18,000원 정도 들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두 남자의 쉰내와 햄버거로 배를 채운 수컷의 본능이 더해졌다. 행복이라는 실체가 보라카이 해변에서, 몰디브에서 모히또 한잔으로도 구현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동네 한바퀴 40.9km를 별 대화없이 타고 오고, 그저 햄버거 2개 세트와 아이스크림으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파랑새는 저 멀리 “하늘 나라”에만 있는게 아니라 “지금 이 곳”에도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스토아 철학,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개념과 실체는 그저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40.9km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일요일은 이렇게 낮잠, 40.8km 그리고 햄버거, 아이스크림으로 행복한 하루였다. 그저 아들이 점점 커가는게 아쉽고, 이 아쉬운 마음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분명히 말하건데, 난 참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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