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식 Aug 18. 2021

상미분과 편미분

나의 삶은 독립적인 요소만으로 상미방되지 않는다.

 수포자는 대한민국 입시교육의 폐해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수학은 세상의 논리적 이치를 잘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나, 대한민국에서는 이과와 문과를 가르는 루비콘 강이다. 나 또한 초중고를 거쳐 수많은 수학공식을 배우고 외웠고 공대에 진학하여 공업수학을 배웠지만, 여전히 수학은 어렵기만 하다. 그나마 대학시절에는 나 스스로 수학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는 힘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아직 두뇌CPU가 쌩쌩하던 20대 중반에 치열하게 생각한 내용들을 여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대개 고등학교 때 수포자 길로 인도하는 두 개의 테마는 미적분과 확률이다. 특히 이공계 계열에서 미적분을 공부하지 않고, 전공을 하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따지면, 영어를 하나도 모르면서 미국에 가서 취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공계의 언어는 단연코 “수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수학에서는 상미방(Total Differential Equation)만을 배운다. 그러다가 공대에 오면, 편미방(Partial Differential Equation)이란 무지막지한 괴수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상미방과 편미방을 줄기차게 풀기만 했지, 그 차이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친절하게 상미분과 편미분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등학교 수학선생님과 대학 교수님도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수식을 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워낙 기본적인 내용이라 다들 이해하고 있겠거니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난 대학시절 상미분과 편미분에 대해서 아주 근본적이고도 철학적인 질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리고 계속 문을 두드렸고, 어느샌가 반대편에서 답을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배우는 미분은 나중에 알고 보니 상미분이었다. 보통 배우기 쉽게 x,y의 좌표계에서 dx, dy 정도를 배운다. 그리고 물리에서는 시간 t가 독립변수로 나타나서 dt까지 배운다. 즉 시간에 대한 수직거리의 미분은 dx/dt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다가 대학에 오면 갑자기 dx, dy, dt 대신에 이상하게 생긴 partial differential (6자를 y축으로 뒤집어 놓은 모양)을 배운다. 그리고 어떻게 편미분하는 방법을 배운다. 하나의 변수를 상수로 보고, 다른 변수를 미분하고, 또 이와 대칭으로 하면 된다. 수식을 쓰지 않고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우리는 편미분을 하는 방법을 배우지만, 왜 상미방과 다른지 안다고 착각하고 지금까지 수학을 배웠다.


 내가 내린 답변은 각 변수가 독립적이냐 독립적이지 않냐이다. 예를 들어 2차원 공간좌표(x,y)을 생각해보자. 두 개의 좌표계는 서로 직각이다. 공간에서 서로 직각이라는 의미는 하나의 변수가 다른 변수로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x = 0 이라는 직선이 있다고 해보자. x=0 직선은 소위 y축이라고 불린다. y = ax라는 직선을 생각해보면, a의 기울기가 크면 클수록 y = ax는 점점 x = 0 (y축)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결코 y = ax는 아무리 a가 커지더라도 x = 0 (y축) 이 되지 못한다. 단, a 가 무한대가 되면 x = 0 이 된다. 즉 x, y 좌표계는 서로 무한이라는 개념이 적용했을 때만 상호 독립적이지 않게 된다.  


 차가 정지되어 있을 때 창문에 내리는 빗방울은 x = 0과 같이 수직 궤적을 그리며 창문을 때린다. 하지만 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질수록 빗방울은 점점 수평으로 눕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속도가 무한대가 되면, 빗방울은 기울기 점점 작아져서 y = 0(x축)과 일치하게 된다. 대학시절, 달리는 스쿨버스 안에서 차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 때 배운 좌표계는 서로 독립적이구나!! (2,3)이라는 좌표계는 x = 2, y = 3이라는 점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독립적인 좌표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즉 좌표계는 x, y, z가 서로 독립적이기 때문에 상미방만 존재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시간 t도 공간 좌표계 x,y,z와 서로 독립적이기 때문에 dt, dx, dy, dz처럼 상미방을 배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이 상미방이 아니라 편미방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독립적이라 생각하는 건 상미방으로 풀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독립적이지 않은 변수의 관계라면 상미방으로 풀 수 없게 된다. 우리 삶이 그렇게 상미방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좌표계와 같이 상호 독립적인 변수로만 세상이 구성되어 있지 않다. 나의 행동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 나의 소비형태는 내가 가진 욕망에만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소비형태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


 상미방과 편비방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단어는 “변수들의 독립여부”에 있다. 현재의 내 삶을 y라는 함수로 정의를 해보자. 내가 내일 어떤 일을 할지를 예측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내 삶을 결정하는 수많은 변수들이 있다. 우선 “나이, 성별, 학력, 재산, 동료, 가족, 친구, 회사생활, 건강” 등과 같은 수많은 변수들이 있다. 그런데 내 건강은 독립변수가 아니라 “나이, 성별, 학력, 재산 등”과 같은 다른 변수들과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니 내 삶을 결정하는 변수의 변화를 구하기 위해서는 d나이, d성별, d학력과 같이 상미분을 해서는 안되고  6나이, 6성별, 6학력 (Partial differential을 6으로 썼다.)과 같은 편미방으로 풀어야 한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내 인생의 많은 문제들을 독립적인 변수로 보고 상미방을 해왔다. 서로 함수관계에 있는 여러 변수들을 마치 독립변수 인냥 아주 단순화하여 풀어왔다. 그래서 생각지 못한 변수들로 인해서 내 삶은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내 삶이 풀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을 독립 요소만으로 상미방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을 정확히 직시하지 못하고, 편미방 대신에 상미방이라는 편하고 잘못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난 대학 스쿨버스 차 창가에서 내 삶의 독립변수와 함수관계의 변수들을 생각하며 20대 중반을 보냈다.


 잘 생각해보면, 편미방은 나에게 겸손을 안겨준다.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왔다고 생각한 내 결정과 판단은 사실은 내가 내린 독립적인 변수들의 총합이 아니다. 가족, 동료, 친구들이 나에게 편비방처럼 나에게 영향을 미쳐서 내 결정과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 편미방은 나에게 “내 삶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의미와 내 삶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를 던져주었다. 이제야 유체역학에 배운 나비에-스톡스 방정식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난 세상의 진리에 조금씩 이해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 오늘도 상미방과 편미방을 통해서 세상의 진리에 한 발짝 다가간 기분이다.  


 

작가의 이전글 과연 나는 그들을 평가할 자격이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