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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Aug 19. 2021

Backspace

나 다시 돌아갈래

 나에겐 아직도 서랍 속, 머릿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글쓰기 주제가 있다. 언젠가는 다 쓰고 말 거란 기약 없는 다짐을 하면서도,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야 할까 고민하는 주제들도 있다. 그 주제 중 가장 큰 난제는 바로 “리만 가설”이다. 사실 리만 가설에 대한 글은 최소한 10편 이상 공을 들여서 글을 써도 풀어내기 어려운 주제이다. 회사에 1시간 정도 일찍 출근해서 약 40~50분 정도 글 쓰는 시간은 내게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시공간의 문이자, 무중력 상태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우주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글쓰기에 큰 문제가 생겼다. 바로 로x텍사 무선 키보드 k780모델이 고장이 나버렸다. 정확히 얘기하면 Backspace 키를 더 이상 쓰기 어려울 지경까지 부서져 버렸다. 처음엔 플라스틱 키판을 사용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압력센스를 누르는 고무패킹까지 떨어져나갔다. 지금은 말그래도 압력센서를 검지로 눌러서 쓰고 있는데 여간 귀찮은게 아니다. 사무실에서 주로 일하는 직장인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는 좋은 노트북이 아니라 키감이 좋은 키보드와 마우스다. 나의 가장 요긴한 무기인 키보드가 더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원래 k780모델은 backspace키에 고질적인 문제점이 있었다고 한다. 하필 가장 많이 쓰이는 키판이 스페이스, 백스페이스, 엔터키인데, 그중에 백스페이스키가 고장나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Num Lock키나 F9같은 키판이 고장났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건데, 하필이면 가장 중요하고 많이 쓰이는 키가 고장나서 전체 키보드를 사용하기 힘들어졌다. 맨처음에 든 생각은 고장나버린 Backspace키에 대한 아쉬움, 원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고마움, 안쓰러움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다시 들었다.


 그동안 Backspace는 묵묵히 내가 잘못 쓴 오타를 하나씩 지웠고, 인터넷 페이지에서 뒤로 가기 기능도 수없이 수행을 했다. 내 생각과 보고서 문구를 얼마나 많이 지웠으면 키판이 고장 나고, 고무패킹이 떨어져 나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 기능을 다하고 부서진 백스페이스키를 보며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던 내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꼭 AS를 받아서 다시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로지텍에서 나온 사무용 키보드 중에서 좋은 녀석으로 하나 마련키로 했다. 적어도 나에게 키보드는 회사에서는 전장에서 싸우는 총이기도 하고, 브런치에서는 생각의 밭을 가꾸는 쟁기가 되기도 한다. 갑자기 성경구절 중에 보습을 쳐서 쟁기를 만든다는 구절이 생각났다.


 아무튼, 그동안 별난 주인 만난 덕에 열심히 백스페이스 기능을 해준 Backspace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며, 다시 고쳐서 새로 태어나기로 약속을 했다. 또한 다시 새로운 총이자 쟁기를 하나 마련해서, 전쟁과 농사를 동시에 수행하는 전사와 농부로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한다. 자판으로 글을 쓸 때 짝짝 달라붙는 키감을 느끼는 것 또한 글쓰기의 아주 소소한 즐거움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서랍 속, 머릿속에 잠자고 있는 수많은 글쓰기 주제들을 다시 씨앗을 뿌려서 새로운 키보드로 쟁기질을 해서 농사를 지어봐야겠다는 기약 없는 다짐을 하며 글을 마친다.


이 글은 그동안 고생한 Backspace키에게 바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하며 Backspace키가 외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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