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 고래
이제와 내게 또 무슨 말을 원해.
무슨 맘을 기대해.
희원은 아랫배가 지져지는 고통에 용수철처럼 잠에서 깼다. 튕겨져 나간 핫팩은 펄펄 끓어서 흰 이불에 검은 그을음을 남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생리통으로 유달리 고생을 하는 희원을 위해 종혁이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핫팩 한 박스를 보낸 일이 어느새 3년 하고도 조금 넘었고, 이 빌어먹을 것의 유통기한이 딱 3년이었으니까, 굳이 수건이 필요하겠어, 싶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보리색 파자마를 슬쩍 들추니 배꼽 부근이 벌겋게 익어있었다. 배를 보려고 고개를 숙이다가 그제야 눈물처럼 떨어지는 땀을 깨닫고 희원은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참 좆같은 꿈이네. 세면대에서 찬물에 적셔지는 수건을 멍하니 보며 희원은 속으로 서툰 욕지거리를 뱉었다. 자기 전에 읽은 단톡방에서 왓챠에 해리포터가 풀렸다길래 4편을 보다 잠든 것이 화근이었는지, 아니면 애써 무시해왔던 싱크 밑 수납장의 그 누런 박스가 오늘따라 굳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는지는 모른다. 여하튼, 그 개자식은 꿈에만 나오면 꼭 그 마이를 입고 나와서 참 아니꼽다. 이슬이 팔에 맺힐 듯한 초여름밤, 취기가 오른 희원과 종혁이 신림에서 이태원으로 택시비 2만 원을 썼던 날에 입고 있던 그 검은 마이. 항상 다 해어진 과잠 차림이었던 종혁이 "희원이 너가 수트 좋아한다고 해서..."라고 말을 줄이며 어색해할 때, 희원은 어쩔 수 없이 두 번째로 종혁에게 반했다. "마이 하나 걸치고 무슨 수트래 바보가." 하는 속 빈 핀잔에 헤헤하던 종혁의 얼굴이 수건 위에 젖었다. 흠칫 놀라서 고개를 세차게 저어도 떨어지는 건 땀방울들 뿐이었다.
"희원아." 낮은데 낮지 않은 듯한 목소리가 참 귀에 붙는 사람이었다. 진한 쌍꺼풀에 낮은 코와 넙데데한 얼굴과 작은 입은 희원의 이상형과는 정반대 그 자체였지만, 그 오묘한 목소리로 불러주는 이름에 희원은 진동했고, 방금의 꿈에서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종혁은 시그니처인 어설픈 미소로 희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1년여 만에 본 약지가 유난히 긴 손은 이제 5월인데도 이상하게 추워 보였고, 함께한 두 번의 겨울마다 그랬듯 희원은 양손으로 종혁의 손을 덜컥 잡았다. 그 순간 포트키를 잡은 마법사들처럼, 희원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처박혀갔다. 발바닥이 무거운 느낌이니 내려가는 것임은 분명했다. 끝 모를 하강에서 희원은 헤어진 다음날 그랬듯이 미친년처럼 소리를 지르며 애타게 종혁을 찾았다. 하지만 종혁 대신, 지금은 냉장고 뒤쪽 어딘가에 있을, 그가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오며 슬쩍 내밀었던, "LOVE"라는 글자에 눈이 내리는 스노우볼이 배에 날아와 부딪혀서 깬 것이었다.
적신 수건으로 볼을 닦은 희원은 침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발에 차이는 것은 '2021.03.02까지'라는 문구였고 희원은 조용히 으르렁거렸다. 다시 누우려 핫팩을 집어 들고 베개를 보니 땀이 눈물 자국 모양으로 젖어있었다. 희원은 베개를 다른 면으로 뒤집고, 이불속에 들어가서 아랫배에 수건을 올리고, 그 위에 핫팩을 올렸다가, 다시 집어 들고, 잠시 망설이다, 체념하듯 슬쩍 다시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