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윤 - 사라져
엉망이 된 내 맘 가지고 그대,
엎질러진 내 맘 가지고 그대, 사라져.
목요일 밤 여덟 시니까, 언제나처럼 텀블러와 책을 덜렁거리며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을 무릎에 놓고 벤치에 앉으니 새삼 그 가로등이 눈에 든다. 저 꼴 보기 싫은 것 때문에 이사를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막상 분위기 잡고 고민해보면 꼭 발목을 잡는 미운 것.
고개를 세차게 저어 털어버렸다. 얼른 독서를 좀 해볼까, 했는데 책을 펼치고 얼마 있지 않아 가로등 쪽에서 들려오는 고성. "이럴 거면 헤어져!" 네이비 아디다스 러닝 팬츠와 아이보리 유니클로 후리스에 검정 백팩을 멘 숏컷의 여학생이 한창 앙칼진 중이었다. 이로써, 저 가로등은 요상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어쩌면 저렇게 토씨 하나 다름없이 같은 톤으로 대사가 반복될까, 싶어 순간 질려버렸다. 범생이 안경에 검은 슬랙스와 몬드리안 작품 같은 아노락을 입은 투블럭 남학생의 표정은 오롯이 3년 전의 나였다.
그래, 라고 했다. 지나가는 대답도 '응, 아 진짜?', '응, 그래서?'였던 내가, 그 사람한테 두 음절 이하의 문장을 건넨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내가 뭘 어쨌길래 그런 말을 하는지, 대체 얼마나 더 살가워야 만족할지, 400일이 넘는 날들 중 단 하루 점심밥의 메뉴를 묻지 않은 것이 이렇게나 죽을죄인지, 그 모든 물음과 불만이 담겨서, 단 두 글자였다. 내가 만약 딱 하나만 더해서 세 글자를 뱉었다면.
"사랑해." 남학생이 한참 발끝을 보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했다. 3년 전 내가 고르지 못했던 정답. 내심 속으로 응원하던 터라, 낮게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여학생은 으앙, 하며 울었고 (아니, 웃었나?) 남학생은 멋진 영화배우처럼 쇄골 아래로 여학생의 머리를 두었다. 모범답안을 본 후의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을 모른 체하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리다가 책으로 눈을 돌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입가에 살짝 미소가 있었을지도.
그렇게, 잠시 소란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