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간 속에서
‘일병 오영택’이 ‘오영택 상병님’으로, ‘식사 맛있게 하십쇼!’가 ‘식쇼~’로, 그리고 ‘잘못 들었습니다?’가 ‘자몽소다?’로 시나브로 변하는 데에는 채 일 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강원도 혹독한 추위에 손이 다 텄어도 꽉 쥐고 있던 주먹은 이제 은근슬쩍 주머니를 찾아 들어가고, 맛있게 먹던 빵식(구 군대리아)도 슬슬 지겨워집니다. 빡빡머리 꼬두라미 이등병들의 얼빠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저런 꼴을 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개구리가 되곤 합니다.
국방부의 시계가 느리게 가는 탓인지는 몰라도, 인생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변화가 있던 지난 1년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루한 몸뚱이가 나름 탄탄해지고, 맹~한 이등병에서 짬내 솔솔 풍기는 상병이 되어 ‘오뱅장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실 겉모습보다도 내면의 변화가 큰 것 같습니다. 사회에서보다 많아진 정신적인 여유를 틈탄 사색과 명상들로 조금 차분해졌고, 어수선한 마음도 천천히 정리된 듯합니다. 군대 오면 철든다는데, (문자 그대로 철을 들고 다녀서인지) 꽤 어른이 되고 입대를 했다고 생각한 제 속도 많이 깊어진 듯합니다. 더딘 하루들이 모이니 새삼 괄목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시간이 참 빠릅니다. 저는 무섭습니다. 지난 8년의 외로운 타지생활, 가족이 되어주었던 여러 고마운 사람들 사이에서 잊힐까 봐요. 처음엔 그들도 저의 부재로 생긴 공동(空洞)을 느끼며 인터넷 편지도 많이 보내주고, 첫 휴가 때는 너무나도 반갑게 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자연은 진공을 허락하지 않아서, 지금은 다른 누군가와 그네들의 제가 없는 추억들로 자리가 메꿔지는 것을 관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18시 핸드폰을 불출 받으면 지난 밤과 낮에 있던 재미난 이야기들에 혼자 웃고, 뒷북을 울려봐도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습니다. 저만 모르고 있던 신변의 변화들이 당연한 대화 속에서는 가슴이 아파져 오곤 합니다.
저는 또, 두렵습니다. 목이 빠지라 기다리는 전역이 말입니다. 무언가를 이루고 얻어 오겠노라며 호기롭던 입대 전의 모습이 가물가물합니다. 전역까지 반년 정도 남은 지금, 목표로 했던 것들을 얼마나 해내었는가 자문해보면 계획의 반도 채 못했음에 자괴감이 듭니다. 비번인 날, CCTV와 불침번 근무가 있는 날 가릴 것 없이 매일 같이 연등(취침 시간 이후의 활동)을 하고 네다섯 시간만 자면서 나름 노력해왔다고 자위해보지만, 실없이 보낸 많은 시간들이 양심을 콕콕 찔러와서 반성하게 됩니다. 사회로 돌아가 이전에 해오던 일들을 무리 없이 진전해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전역 날이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시간은 지구가 태양을 맴도는, 하루하루 느낄 수는 없지만 사실은 상상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흐르는 듯합니다. ‘끝’이 존재하는 특수한 시간에 놓여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게 깨닫고 마는 그 유속을 느끼며 이런저런 생각 위를 부유하는 D-212의 밤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라는 말의 진의가 피부에 살짝 닿는 듯합니다. 시한부의 버킷리스트처럼 비장하지는 않더라도,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유예하지 않고 충실히 해나가는 하루들을 보내다 보면 원하는 인간상에 더욱 가까워진 저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도 고요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다시 한번 삶에의 태도를 다잡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