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그려낸 유토피아, <지상의 여자들>

by 유안나

1. 줄거리 : 남자들이 사라진다


지방의 소도시 구주에서 사람들이 사라진다. 정확히는 남자, 그중에서도 화내는 남자들이 사라진다. 불규칙한 시간과 장소에서 점점 많은 남자들이 사라진다. 필리핀에서 시집온 아내를 발로 찬 남자가, 나이든 아내의 얼굴을 터트린 남자가 사라졌다. 현장에는 늘 피해자 여성이 있었고, 손찌검, 발찌검과 함께 화를 내던 남자들이 그들의 눈앞에서 환영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이 불가사의한 실종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구주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구주 밖 사람들에게 가장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각종 언론에서 이 사건을 흥미로운 가십거리로 다루고, 각자의 논리적인 추론을 펼친다. 누군가는 이 사건이 사이비 종교의 범행이라고 주장하고, 누군가는 환경오염에 의한 집단 착란이라고 주장한다.


출장차 남편 형근을 90일간 서울로 보낸 성연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휩싸인다. 아버지를 포함한 잇따른 남자들의 실종을 일종의 ‘환경 정화’라고 생각하는 친구 희수와는 달리, 성연은 자꾸만 곁에 없는 형근에 이입하여 희수와 말싸움을 벌인다. 정작 형근은 구주를 떠나 자유로운 서울 생활을 누리고 있다. 형근이 자리를 비운 사이 성연과 희수 사이에는 오래된 감정이 다시 싹트고 있었다.


못난 남자들의 실종과 함께, 갈라지는 구주 여성들의 여론 속에서 성연은 갈등에 빠진다. 누군가는 이를 여성에게 내려진 축복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죄 없이’ 사라진 남성들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형근을 포기할 수 없는 성연은 후자의 편에 서서 고민에 빠진다. 무사히 출장을 마친 형근은 시모와 함께 다시 구주로 돌아오고, 성연은 재회하는 터미널에서 용기 내 말한다. “좋아하던 여자가 있어요.” 이내 형근이 사라진다.



2. 변화와 갈등, 그리고 혁명


잇따른 남자들의 실종을 받아들이는 구주 여자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남은 여자들 사이에서 의견의 충돌이 일어났다. 한편에서는 이 사건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을 주장했다. 또 한편에서는 남자들의 실종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결혼한 여성이었다. 전자의 편에는 희수가, 후자의 편에는 성연이 있었다.


어떠한 사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다양하기 마련이다. 위와 같은 논쟁은 왠지 낯설지 않다. 변화하는 상황 앞에서 누군가는 이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윤리·도덕적으로 모든 존재를 고려하며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또 누군가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꿈꾼다. 이는 오늘날의 페미니즘 논의 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도이다.


『지상의 여자들』은 변화를 맞닥뜨린 여성들의 다양한 의견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변화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무게를 둔다. 소설의 한 장면에서는 구주 사건에 대한 한 변호사와 대중문화평론가의 논쟁을 보여준다. 변호사는 ‘왜 나는 아닌가’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구주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폭력과 야만이 들끓고 있다며, 실종된 이들 역시 사회 구조가 나은 약한 인간일 뿐임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대중문화 평론가는 ‘왜 그는 아닌가’라는 제목의 논평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강력범죄에 의해 살해되는 전국 각지의 여성 수가 구주의 실종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중략) 같이 반성하고 성찰하자고 종용하지 마십시오. 기울기가 다른 땅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지 마십시오." - p.154


변호사의 주장은 우리의 사회 체제 안에서 억압받은 남성 개인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사회에 명백히 존재하는 성 불평등을 간과하고 있다. 대중문화 평론가는 정확히 이 지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죽은 여성, 맞아서 다친 여성의 이야기를 접한다. 그리고 가해자는 언제나 남성이다. 구주에서 일어난 주동자도 없는 사건에서 일반의 여성들이 죄의식이나 책임감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


소설은 희수의 대사를 통해 구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가지는 함의에 대해 보여준다. 희수는 구주 사건을 재앙이라 일컬으며 자신을 위로하는 한 남성에게, 이것이 여성들에게 여성주의적 혁명일 수 있음에 대해 말하였다.


“여자들의 관용은 강요된 관용에 가까워요. 길들여진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가진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충성과 숭배예요. 이 구도를 내리찍은 게, 우리가 목도하는 실종이에요. 이게 혁명이 아니면, 여성운동이 아니면 뭐죠?” -p.271


구주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은 단순히 신비한 사건, 불가사의한 재앙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여성주의 혁명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3. 살고 싶은 도시, 구주


“‘요새, 보루, 유토피아’ 같은 단어가 구주 앞에 붙었다. 구주는 여성들이 살고 싶은 도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p.143


남자들이 사라진 구주에서는 점점 변화가 일어났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여자들이 이사를 오고, 남자들이 떠났다. 남자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여자가 앉았다. 중요한 일을 여자가 도맡아 하고, 남자들은 몸을 사렸다. 남자들은 이제나저제나 자신이 이름 모를 우주 지성체의 표적이 될까 두려워하며, 화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소설 속 두려움에 행동을 제약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일상의 두려움을 가늠해보게 한다.


여자들의 일상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어폰을 낀 여자가 새벽의 아파트 단지를 거닐었다. 운동복을 입은 여자가 지하 주차장을 느긋이 빠져나왔다. 브래지어를 벗은 여자가 정글짐에 올라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중략) 철조망과 담을 지난 여자들이 어느 곳이나 걸어 나갔다. 구주의 낮과 밤은 서서히 여자들의 것이 되었다.” -p.228


구주의 여자들은 일상의 자유를 얻었다.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이어폰을 끼고 걷는 것이, 늦은 시간에 외출을 하는 것이,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느긋하게 걷는 것이 왜 평범하지 않은 일인지는 우리나라 범죄 통계와 인터넷 댓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가고 싶은 곳에, 원하는 시간에, 마음 편히 가는 구주의 여성들을 보여주며, 현실의 여성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구주에 사는 한 비혼모 여성은 자신의 아이에게 다음과 같은 동화를 들려주었다.


“옛날 옛날에 하늘에 살던 천사가 땅을 내려다봤어요. 땅에는 슬픈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남자들이 우락부락한 손으로 여자들을 때렸어요. 보다보다 화가 난 천사는 나쁜 남자들을 골라 하늘로 데려갔어요. 땅에 남은 여자들이 눈물을 멈추고 노래를 불렀어요.” -p.140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아이에게 아빠가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구주에서 아빠가 없는 아이는 이상하지 않으며, 남편이 없는 여자는 자립할 수 있었다. 신화 같은 이야기는 현실이 되고 있었다. 남자들이 사라지는 구주는 여자들이 살고 싶은 곳, 어쩌면 유토피아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구주는 남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도시이자, 여자에게 가장 안전한 도시가 되었다.



4. 여성이 그려낸 유토피아


유토피아로서 남자 없는 사회를 그려낸 소설은 『지상의 여자들』이 처음은 아니다. 1905년, 샬롯 퍼킨스 길먼의 『허랜드』에서 이미 여성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그려낸 바 있다. 1968년 마를렌 하우스호퍼의 소설 『벽』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남성이 사라진 사회를 그렸으며, 1975년 조안나 러스의 『여자 사람』에서 역시 남자 없는 미래 세계 ‘와일어웨이(Whileaway)’를 그렸다. 한편,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지위가 뒤바뀐 사회를 그리기도 했다. ‘이갈리아(Egalia)’는 평등주의(egalitarian)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그리는 사회는 곧 남성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남성 작가는 유토피아를 그리면서 작품 속 남성 주인공을 이끌어주고(안내원), 보살펴주고(치유자), 연정을 나눌(성적 파트너) 현지인 여성을 선물하는 특징이 있다. 남성 작가의 유토피아 속 현지인 여성들은 유토피아에 살고 있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닌 남성 주인공에 의해 계속해서 시각화의 대상이 되며, 주체적인 역할은 현지인 남성에게 빼앗겨 버린다.[1]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이른바 ‘모성’이 사라진 사회를 그린다. 모든 아이가 인공 수정을 통해 태어나고, 양육과 교육은 국가가 책임진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라지고, 모든 형태의 성애가 자유롭다. 헉슬리가 그리는 사회는 자유와 인간성이 부재하는 디스토피아 사회이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 양육에서의 해방, 그리고 남성과의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에서의 탈피는 어쩌면 유토피아의 가장 중요한 요건일지도 모른다. 다만, 진정한 여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재생산 기능은 해방되어야 할 억압이 아닌, 특권이 될 것이다.


남성 작가의 SF소설에서는 먼 미래세계를 꿈꾸는 기술 발전적인 측면에서의 공상과학적 요소가 우세한 반면, 여성들의 SF소설에서는 도덕적, 인간적 문제 설정이 강조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여성들이 불평등의 현실에서 당하는 고통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남자 없이도 여성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대안적 공상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역으로 아주 강력하게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2]


박문영의 SF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남자가 사라지는 사회를 그림으로써, 남성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고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뿐만 아니라 여성으로 하여금 현실의 폭력과 불평등이 해소된 이후의 삶과 그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게 한다. 작가 역시 작가의 말을 통해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후였다. 외계 존재와 문제적 인물의 활약보다 허약한 개개인이 맺고 나누는 관계가 중요했다’고 밝혔다.


여성 주체의 SF 소설을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 작가들은 기존의 남성 중심의 문학에서 쉽게 간과되는 불평등의 현실을 보다 통합적인 시각에서 그려낼 수 있다. 독자들은 끊임없이 여성의 삶과 경험이 반영된 문학작품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미래상을 제시하는 SF 소설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평등을 이루기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1]김은선, 2017, 「유토피아 작품 속 젠더 양상과 헤테로토피아 문학의 의의」,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p.8.

[2]김숙희, 2002, 「여성적 글쓰기의 또 다른 지평: SF소설; 여성들이 그려내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젠더연구』 제6호,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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