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기행 - 뉴욕 12
로어이스트는 여러 모로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맨해튼의 어디가 안 그렇겠냐마는) 남쪽으로든 동쪽으로든 조금만 걸어 나가면 이스트 강을 끼고 있는 멋진 산책로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루클린으로 넘어갈 수 있는 맨해튼 브리지(Manhattan Bridge)와 브루클린 브리지(Brooklyn Bridge)와도 상당히 가깝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품고 있는 브루클린 브리지가 지척에 있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정작 브루클린으로 넘어가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바로 이 풍경 때문이었다. 맨해튼보다 조금 덜 빽빽한 브루클린을 바라보는 건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 지역의 전체를 볼 수 있는 건 그 지역에서 한 발짝 물러나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스트 강을 사이에 두고 연결된 두 다리가 모두 보이는 여긴 확실히 명당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의 물길이 주는 청량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맨해튼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들을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이 영화 <브루클린>에서 보여줬던 이민자의 애환과 오버랩되어 나를 끝내 애잔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날은 그 노래가 끌렸나 보다.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와서 돌아보니 한 남미 여인이 쿰비아(cumbia)를 들으며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소수 인종이 히스패닉계라더니 과연 맨해튼 곳곳에서 그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 3D 현장이었다. 내 옆에 앉은 저 여인도 오늘 힘든 하루를 마쳤으리라. 저렇게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서도 가끔 한숨을 내쉬는 걸 보면. 어쩌면 아메리칸드림을 기대하며 이민의 관문을 넘었을 저들과 인생의 새로운 판을 짜려는 나의 심정이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도 플레이리스트에서 쿰비아를 찾아 들었다. 나의 페루 스타 Grupo 5를 추억하며.
그런가 하면 중국의 이민 사회는 좀 더 근원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들의 조국에서 수없이 봐왔던 군무(群舞)를 미국, 그것도 뉴욕의 맨해튼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사진만 보면 여기가 미국인지 중국인지 아니면 아시아의 어느 곳인지 알 게 뭐람. 하지만 그들은 당당했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강강술래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열심히 떼춤을 췄다. 그들의 춤사위는 단조롭지만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이상하게 빠져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건 단순히 건강과 유희를 넘은 일종의 Oneness(완전한 일체)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때로는 당당하고 때로는 애잔한 이곳의 이민 스피릿을 느껴보느라 정작 브루클린은 한참 후에야 넘어가게 되었는데,
브루클린 브리지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교각이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 지역을 연결하는 거대한 현수교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인구 밀도와 산업 밀도가 높은 대도시에서 도로의 중심부를 양보할 수 있다니, 시민을 먼저 생각하는 이 도시의 이념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맨해튼은 정말 보면 볼수록 '걷고 싶은 도시'이다.
삐걱거리는 나무다리가 사뭇 불안한데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만 나무로 되어 있고, 각각의 연결 부위는 강철 케이블로 엮어놓아서 생각보다 견고하다. 좌우로 연결된 차도와 그 중심에 다니는 지하철 모두 사람보다 아래에 있어서 여기를 걷는 동안은 무언의 존중을 받는 느낌도 든다. 중간에 세워진 2개의 고풍스러운 석조 타워는 브루클린 브리지가 견뎌온 140여 년이라는 세월 위에 내가 서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다리를 건너서 Washington Street를 따라 내려오는데 저 멀리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수많은 영화와 예능 프로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곳은 덤보(Dumbo)라는 지역이다.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의 약자로, 맨해튼 브리지 아랫마을이란 뜻이다. 뉴욕 정보를 검색했을 때 어마어마한 포토존으로 소개된 곳이라 꼭 한번 들르고 싶었는데, 과연 막 찍어도 화보 같다.
브루클린 브리지와 맨해튼 브리지가 나란히 붙어 있어서 처음에 좀 헷갈렸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타워에 있었다. 브루클린 브리지의 고풍스러운 석조 타워와는 대조적으로 맨해튼 브리지의 타워는 강철로 만들어져서 한껏 모던한 느낌을 준다.
덤보를 지나 강변을 따라 브루클린 안으로 들어가 본다. 다리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맨해튼보다 훨씬 한적하고 멋스러운 동네가 펼쳐진다. 맨해튼이 가장 잘 바라보이는 페블비치(Pebble Beach)에는 앉을 수 있는 공간도 넉넉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강변 인프라는 맨해튼보다 브루클린 쪽이 훨씬 나은 것 같다.
페블비치 뒤쪽에는 전망을 볼 수 있는 브루클린 하이츠 산책로(Brooklyn Heights Promenade)가 있는데, 찾아가는 길은 비록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지만, 조금만 참고 올라가면 이런 멋진 공간이 나온다. 여기서라면 영화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에서 모건 프리먼이 사랑했던 뷰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마치 도미노처럼 건물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온다. 그렇게 한여름의 뜨거운 낮의 시간은 가고 선선한 밤의 시간이 찾아오자 전에 없이 센티멘탈해진다. 내가 돌아다녔던 맨해튼이 저렇게 생겼던가. 맨해튼에 있을 때는 몰랐던 모습을 한 발짝 물러나서야 겨우 볼 수 있었다.
내가 도시를 사랑하는 만큼 도시도 나를 사랑하기를,
너그럽게 이 철없는 여행자를 품어주기를 기원한다.
- 김영하의 <여행자(하이델베르크)> 중
다시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늘 가던 강변 산책로에 다시 한번 들렀다. 두 교각에 매달린 전구의 불빛이 이스트 강에 내려와 반사된 모습이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킨다. 이제 뉴욕에서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오늘의 브루클린이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느꼈던 이민자들의 삶과 함께. 그래서 오늘도 하늘에 대고 묻는다.
저 잘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