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뒤를 이어 그리스의 조그만 섬에서 다 쓰러져가는 호텔을 지키는 소피 앞에 생전 처음 할머니라며 나타난 이 사람, 어째 겉모습부터가 심상찮다. 성형 중독 같은 외모에다가 게이일 것도 같은 중저음의 묵직한 보이스에 한 번 놀라고, 진작 그랬어야 하지 않냐며 원망하는 손녀에게 원망하면 살찐다며 되받아치는 센스에 두 번 놀라고, 마성의 집사(앤디 가르시아)와 함께 아바의 'Fernando'를 너무나 매력적으로 소화해내서 세 번 놀라게 한 의문의 할머니.
2018년도에 나온 영화 <맘마미아 2>의 강렬한 엔딩씬을 장식해준 그녀의 정체는 바로 셰어(Cher). 본명 Cherilyn Sarkisian으로 무려 1946년생, 올해로 74세 되시겠다.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입력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Believe'란 곡이다. 시원한 기계음과 신나는 디스코풍의 이 노래는 팝 좀 들었던 사람이라면 도입부만 들어도 아~ 할 정도로 익숙할 터. 나 역시 학창 시절 꽤 자주 들었던, 멜로디만 알고 제목과 가수는 모른 채 흥얼거렸던 'Do you believe in life after love~'라는 후렴구가 아직도 생각난다.
1999년에 발표된 'Believe'와 2018년에 'Fernando'로 다시 찾아온 그녀의 목소리는 20여 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오히려 기계음이 섞인 것보다 육성이 백배 천배 나은 듯. 한마디로 남과 여의 경계에서 묵은 숙변까지 뻥 뚫어주는 천상의 목소리라고나 할까. 사실 'Believe' 외에는 잘 알려진 노래가 없어서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편인데, 알고 보면 '잭슨 5' 시절부터 활동했던 마이클 잭슨과 팝의 결을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1965년, 19세의 어린 나이에 '소니 & 셰어'로 데뷔 후 영화 <맘마미아 2>에 출연하면서 영감을 받고 아바의 리메이크 앨범을 낸 2018년도까지 가장 롱런하고 있는 전설의 디바. 오늘 그녀의 이야기를 만나러 브로드웨이로 향한다.
타임스퀘어 편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브로드웨이(Broadway)는 맨해튼을 사선으로 관통하는 유일한 도로이다. 19세기만 하더라도 브로드웨이 극장가의 중심은 유니언 스퀘어였으나, 땅값이 오르면서 타임스퀘어가 있는 미드타운 쪽으로 점차 이동하기 시작했고, 공연의 형태도 연극,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해지면서 이 일대는 '공연계의 성지'로 거듭나게 된다. 그래서 뉴욕에 가면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공연 하나쯤은 꼭 보려고 했는데, 그러다 우연히 '로터리 응모'라는 걸 발견했다. 브로드웨이 다이렉트란 웹사이트에서 'Lottery' 메뉴로 들어가면 그날 응모할 수 있는 공연 목록이 뜨는데,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강탈한 건 다름 아닌 <The Cher Show>.
뮤지컬을 본다면 <오페라의 유령>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도 영화도 모두 감명 깊게 본 전설의 그 작품을, 오래 전 런던에서 엄청난 가격에 포기해야 했던 애증의 그 작품을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만큼은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의 계시인지 '팬텀'은 아예 목록에도 없고, 대신 <맘마미아 2>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셰어와 그보다 더 강렬한 포스터에 꽂혀버리고 만 것. 그녀라면 로또가 아니라 생돈을 내고서라도 보고 싶었기에 고민 없이 응모했고, 다음날 자고 일어났더니 거짓말처럼 당첨되어 있었다. 결제 시일까지 불과 10여 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메일을 확인하다니 타이밍 한번 절묘하군. 로또 맞은 기분이 이런 걸까?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단돈 $33에 보게 되다니.
티켓을 배부받기 위해 30분 전에 극장으로 갔더니 기나긴 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티켓을 예매했을 텐데 왜 굳이 이 더운 여름에 줄을 서야 하는 걸까?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수억 명의 인구가 사는 엄청난 넓이의 미국 땅에서 줄 서기란 모든 이벤트의 워밍업이란 것을...어찌 됐든저가 응모여서 제일 안 좋은 자리를 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다행히 1층 중심에 있는 오케스트라 섹션이었다.
심장 박동 소리를 연상케 하는 전주가 울려 퍼지면서 'If I Could Turn back Time'으로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인들이 뜨거운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단 2번의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나도 이렇게 심쿵한데, 청춘부터 황혼까지 그녀의 노래와 함께 했을 이분들에게 오늘의 공연은 더없는 감동으로 다가왔으리라. 공연은 소녀 시절의 Babe, '소니 & 셰어' 시절의 Lady, 그 이후의 Star라는 총 3명의 셰어가 등장하여 그녀의 삶에 대한 썰을 노래와 함께 풀어나간다. 인생에서 충격을 받을 만한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캐릭터가 변하듯 연기자도 변한다. 그만큼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인생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되었다. 그녀는 한없이 좌절하고, 수없이 방황했고, 원 없이 상처받았지만 그럼에도 외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This is far from over. You haven't seen the last of me.
어쩌다 첫 공연 때 커튼콜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꾸준한 몸 관리와 사그라들지 않는 노래 실력을 보면. 자신의 생애를 자신의 노래만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비록 얼굴은 성형 중독의 부작용으로 안쓰럽긴 하지만, 공연의 메시지처럼 그녀는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 점이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