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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Apr 23. 2020

백두산 가는 길

살면서 백두산에 한 번쯤은 가 봐야 하지 않겠나.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흠칫했다. 왜냐하면 나는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가 빠지게 올라갔다가 정상 한번 찍고 내려온다는 게 그저 허무하게 느껴져서. (같은 원리로 스키류도 안 좋아한다.) 그런 내가 중국을 여행하겠다고 결심하면서 제일 먼저 정한 목적지가 백두산이라니, 이거야말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냥 왠지 가야 할 것 같았다. 세상에 '그냥'이라는 건 없으니 굳이 말하자면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고 해야 하나. 어딘가를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 지역에서 마구 주파수를 날려오는 느낌적인 느낌...


대련에서 출발한 일정이 고구려의 발자취를 따라 산골 마을을 훑는 동안 백두산에서 가까운 통화(通化)라는 곳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는 백두산이 있는 백하(白河)를 거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용정(龙井)까지 기차가 연결된다. 중국 와서 처음으로 기차를 경험해 보기로 했다.

중국의 기차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목욕을 안 해서 땟국물이 흐른다고 '되놈'을 '땐놈'으로 비하해서 부르는 말을 듣고 자란지라 안 좋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청소도 말끔히 되어 있고, 시트와 베개도 새것으로 세팅되어 있고, 보온병에는 따뜻한 물까지 담겨 있었다. 어쩐지 다들 컵라면을 한 보따리씩 들고 타더라니.

백하(白河) 기차역에 내려서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이런 깡시골의 기차역이 마치 유럽의 어딘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기자기한 미관이라니! 중국의 디테일과 인프라에 두 번 놀라며 출구로 나오는데, 삐끼가 기다렸다는 듯이 백두산행 택시를 흥정해왔다.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소개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조선족 흉내를 내는 중국인이었던 것 같다. 한국어 발음이 심하게 얼화(儿化: 중국인의 발음 특성, 부드럽거나 귀엽게 보이려고 끝에 儿을 붙임)된 걸 보면. 일단은 여행 카페에서 알아본 시세와 같은 금액이어서 그냥 타기로 했다. 나중에 다시 교통편을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중국에 살고 있으니 다 같은 중국인인데, 특별히 조선족이라고 더 이용해주는 것보다 지금 내 앞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가 제공해준 택시를 타고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니 저렇게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참고로 지금은 5월 중순. 뭔가 불안해진다.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천지는 볼 수 있겠지?

백두산의 중국 이름은 장백산(長白山). 여기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중국 땅이니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게 맞지 않나 싶다. 혹여나 통일이 되어 북한 측의 백두산을 간다면 그때는 우리식의 이름을 마음껏 불러주리라.


자, 이제 백두산으로 오를 차례다. 우리의 흔한 상식으로 등반을 해서 갈 것인가? 물론 등반 코스도 있다. 하지만 나처럼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국은 어떻게 하면 산의 정상까지 최단시간에 편하게 이동시켜줄 수 있는지를 연구했고, 그 결과 백두산 정상까지 롤러코스터를 타듯 넘어갈 수 있는 산악 차량을 운행하고 있었다. (물론 별도의 차량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산악 차량이 내려준 곳은 2,670m의 천문봉(天文峰). 눈이 쌓인 형태가 꼭 호랑이 등짝 같다. 자세히 보니 하늘색도 투톤이다. 마치 저 너머에 바다라도 있는 것처럼. 여긴 대륙이 아니던가.

드디어 천지에 이르렀다. 비록 상상했던 푸른빛의 드넓은 천지는 눈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지만, 그보다 몇 배는 파랄 것 같은 청정한 하늘 아래 눈 덮인 천지의 모습도 충분히 감동이었다. 마치 저 눈들이 원래의 천지 색이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한참을 서 있는데, 아래쪽에서 눈이 녹아내린 천지의 일부를 발견했다.

흰 눈과 대조적으로 검은색에 가까운 천지의 빛이었다. (저런 빛깔이니 괴물이 산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지 않았을까...) 남한에서 제일 높은 1,950m의 한라산보다 거의 천 미터나 더 높은 이곳에 올라와 있자니 하늘과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비록 설산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에 못지않은 따사로운 햇살이 적절한 균형으로 온도를 맞춰주고 있었다. 대련에서 여기까지 왔던 여정이 영화처럼 스쳐간다. 또한 앞으로 더 길게 이어질 여정을 그려보며 담대한 뜻을 담아본다. 내가 지금까지 놓쳤던 것들은 무엇이며, 앞으로 생각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염원했다. 언제 어디에 있든 지금의 이 하늘과 가까웠던 기억은 반드시 간직하리라.

천지의 빛깔이 못내 궁금하긴 했는데, 그로부터 4년 후 엄마가 백두산 기행을 다녀오시면서 찍은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빛깔의 향연을 사진으로나마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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