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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Oct 22. 2020

손을 보고 눈물이 났다

어느 날 문득 낯선 나와 마주하다

낯선 '손'


'손'이라는 것이 내 몸의 일부인 것이 확실할 텐데, 몇 해 동안 나는 솔직히 손의 존재감을 완전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아니, 깨어있는 동안 한순간도 쓰지 않을 일이 없는 손인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확실히 손이라는 것은 내 의식에서 도통 주목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며칠 전 갑자기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집안을 청소하다가 평소에는 잘 끼지도 않는 결혼반지를 다시 끼어보면서 였다. 결혼 전에는 그토록 다들 로망이라고 안달하면서 수개월 치 월급에 맞먹는 다이아 반지를 마련한다. 하지만, 결국엔 금고에 넣어 고이 모셔두고는 몇 년에 한 번 끼어볼까 말까 한 결혼반지. 그마저도 이제는 손가락 마디에 걸려 좀처럼 들어가지를 않았다.


아니, 반지도 반지지만, 이. 거. 시. 과연 내 손이 맞나?

어쩜 이토록 손마디는 굵어지고, 쭈글쭈글 주름으로 거칠어 있는 것인지.


잠시 충격에 휩싸여 낯설게만 여겨지는 내 손을 지긋이 바라다보았다. 부인하고 싶어도 내 몸뚱어리에 붙어있으니 이. 거. 슨. 내 손임에 틀림이 없다!


머릿속에 어떤 구체적인 표현이 떠오르거나 생각이 미처 완결되기도 전에 순간 눈물부터 핑 돌았다. 눈에 고여 철철 흘러내릴 정도의 눈물은 아니었다. 그냥 눈시울을 살짝 적실 정도의 찔끔 차오르는 눈물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마음 한구석이 저려오는 서러운 감정만은 서서히 온 마음을 축축하게 적셔갔다.


© shotbyrain, 출처 Unsplash


이 손은 내가 알던 예전의 내 손이 아닌 것만 같았다. 흡사 10년도 훌쩍 전에 돌아가신 내 기억 속 외할머니의 마르고 앙상했던 그 손과 닮아 있었다. 일평생을 살림살이에 찌들어 도무지 살쩜이라고는 남아나지 않았던, 뼈에 거죽만 입힌 듯한 그 가련했던 손. 그런데도 안쓰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땐 가슴까지 애정과 온기가 전해오는 그런 손이었다. 할머니의 그 다정했던 손길이 지금도 눈물겹도록 그립지만, 내 손이 그렇게 세상 풍파와 온갖 고생에 닳고도 늙어버리는 일만은 몸서리치도록 부인하고 또 저항하고 싶었다.


아, 어느새 내 손이 이토록 거칠어진 것일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손은 이렇게 표면이 까칠하고 푸르뎅뎅한 혈관이 도드라지게 보이지도 않았고, 살은 없어 앙상한데 뼈마디만 유독 굵지도 않았었다. 전에는 항상 네일숍에서 양 손에 붙인 젤 네일이 화려하게 손을 장식하고 있었다. 피아노를 친 것은 아니지만 타고나기를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기에, 열 손가락을 활짝 펼치고 바라보면 딴엔 제법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사람마다 자기 생각에 예쁜 구석 하나씩은 있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는 그나마 손과 발이 그런 구석이라고 생각했건만. 이제는 '한때는 그랬었는데...' 하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구나!


미끈거리는 핸드크림을 아무리 덕지덕지 발라봤자다. 이제 손조차 흐르는 세월을 속일 순 없다. 어째서 이토록 급속한 손의 노화가 왔는지, 그 실마리를 찾으려 이런저런 사정들을 되짚어 본다. 당연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4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뒤로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는 피같이 선명한 사실이다. 그래, 주부로 산다는 건 아무리 주의 깊게 신경 쓴다 한 들, 손을 혹사시킬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현실에 대면하게 되는 법. 고무장갑이 있으면 뭐 할 것이며, 핸드크림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것들을 아무리 열성적으로 애용한다 한들, 항상 손을 물에 담글 수밖에 없는 빡센 가사 노동 앞에서는 헐벗은 듯 무력할 뿐이다.


"나이 들어 손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고생을 하며 살았는지를 알게 된단다."


예전에 외할머니가 어린 내게 나지막하게 들려주셨던 그 말씀이 귓전에 되살아난다. 대학 시절 어떤 교수님은 남자분인데도 유독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더랬다. 강의를 듣는 내내, 그분의 고운 손만 눈에 들어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피아노를 오래 치던 아는 부잣집 언니도 나보다 나이가 꽤 있지만 손이 참 고왔다.


아, 그렇다면 결국 내가 나름 고생을 꽤나 하며 살고 있는가 보다! 정작 나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했었는데, 거칠어진 내 손이 작금의 내 현실을 너무도 노골적으로 일깨워주는 듯하여 서글픈 심경이 든다.


© i_am_nah, 출처 Unsplash


또 다른 낯선 '손'



내 손은 이 모양 이 꼴이라치고, 그렇다면 우리 남편의 손은 어떨까?


문득 궁금해져 어느 날 저녁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편의 손을 슬며시 가져다 가만히 관찰해보았다. 솥뚜껑처럼 커다랗고 뭉뚱한 그 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까칠까칠하고 군데군데 까지고 상처도 있었다. 괜스레 내 마음도 어딘가에 베인 듯 아파진다. 내 거칠어진 손보다도 훨씬 더 세상 풍파에 시달리고 피로해 보이는 험한 손이었다. 결혼할 당시에도 그의 손은 가늘고 긴 부드러운 손이라기보다는 크고 억새 보이는 일 잘할 것 같은 강한 남자의 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흐르는 세월에 이만큼 거칠고 억세져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내 못나진 손을 그의 손에 살포시 포개어 보았다. 표면이 보드랍지는 않지만 내 마음을 다 기댈 수 있을 만큼 따뜻하고 믿음직한 손이다. 우리의 손은 그렇게 서로 힘겨운 삶을 의지하며 함께 일상을 살아내고 늙어왔다. 내 손보다 그의 손이 몇 배는 더 거칠어진 것이 가슴이 아파왔다. 내 삶의 무게였을 부분을 남편이 그만큼 더 이고 지어준 것은 아닌지. 항상 무거운 것은 자신이 도맡아 들어주던 그 손이 오늘따라 너무도 고맙고 애정이 갔다.


이제 우리 손은 오늘보다 점점 더 늙고 주름지고 거칠어져만 가리라. 함께 나눠 끼었던 결혼반지도 손마디에 걸려 힘겹게 들어가는 손가락이 되리라. 하지만 언제까지라도 둘이 맞잡은 이 손을 결코 놓지는 않으리라. 아무 영문도 모르고 나한테 손이 잡힌 남편은 잠든 중에도 내 손을 더욱 꼬옥 쥐었다.


© shoeibabh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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