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혼자서 살아갈 순 없다
나면서부터 사람에 대한 불신이나 경계심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는 없으리라.
열린 마음으로 편견과 마음의 벽 없이 사람을 대하고 싶지만, 살면서 산전수전을 겪다 보면 그것은 자연스레 불가능한 일이 된다. 오직 뼈를 깎는 노력과 자기 수련으로 어디까지나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 볼 뿐이다.
익숙하지 않거나 독특한 대상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항상 더 안전하다.
그러다 보니, 비록 그로 인해 어쩌다 예외의 가능성이 발생한다 해도, 인간은 우선은 자기 안에 축적된 기존의 데이터로 판단을 한다. 특히나,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일 경우에는 더 쉽게 그런 '경로 의존성'을 따르게 된다.
'나쁜 놈, 좋은 놈, 이상한 놈... '
세상 모든 이들에게 나만의 분류 딱지를 제멋대로 붙이는 것이다.
한때 아직 세상을 잘 모르던 시절에는 지금보다 타인에 대한 가드가 한참 낮았다.
세상에 처음부터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믿었고, 모든 인간 군상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단순하고 명확해 보였다. 한 사람의 내면에는 동시성과 다면성이 존재하는 법이며, 그와 더불어 주어진 환경과의 사이에 모순되고 뒤틀린 화학작용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미숙한 나는 아직 잘 몰랐다.
그러다 보니, 쉽게 사람을 믿고 따르는 일도 가능했던 것 같다. 의도나 진의를 예리하게 의심하는 것보다 곧이곧대로 믿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했다. 이제는 아주 미세하게 이상한 낌새만 느껴져도 진작에 차단해 버릴 것들도, 일단은 열린 마음으로 겪어보자는 심정이 항상 더 강했던 것 같다. 어떤 확실한 증거가 입증될 때까지는 의심이나 판단을 보류했다.
'그래봤자 무슨 엄청난 손이 있겠어'
... 하는 자신감도 한몫했던 것일까?
그러다 사기도 당하고 배신도 당하고 상처도 받았더랬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정말이지 오만가지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을 뜬다. 물론 선하고 착하고 좋은 사람들도 참 많았다. 다만, 좋은 이들에 대해서는 경계를 할 필요가 없으므로, 행여라도 만나게 될 못된 이들에게 바짝 신경을 기울여 주의를 하는 것이 실패를 할 가능성을 낮추는 길이었다. 그러다 몇몇 선한 이들을 놓치게 된다 해도, 간혹가다 스치는 치명적인 뒤틀린 사이코들을 삶에서 거르는 편이 내 안위에 더 중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운 나쁘게 한번 잘못 걸렸다가는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그런 작자들을 피하는 것이 생존에 더 중요하니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은 사람에 대한 호기심 자체가 잘 일지 않는다. 아니, 실은 안타깝기는 커녕 그런 상태가 심적으로 아주 편안하고 쾌적하다. 조금만 상대해보면 타자에 대해 단박에 판단을 내리고 적절한 거리를 책정하여 유지하려 한다. 모든 갈등과 고민의 시작은 결국 타자와 얽히고 설키게 되는 것이 발단 아니던가.
뭔가 이상해 보이는 사람은 아싸리 처음부터 얽히지도 말아야지.
선을 넘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하고는 항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지.
나랑 안 맞을 것 같은 사람하고는 그냥 영원히 노력도 할 필요 없어.
웬만치 굳어진 나만의 프레임으로 이제는 처음부터 타인들을 거르게 된 건지도 모른다. 이미 나를 중심으로 그린 관계의 원이 있는 상태에서 더는 리스크를 지면서까지 잘 모르는 누군가를 깊게 입장시키고 싶지 않다. 미지의 관계에 대한 모험이나 탐구를 하느니, 그냥 이미 알고 있는 세계에 나를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가두게 된 건지도 모른다. 다만, 너무도 안락해서 도저히 이 우물을 박차고 나갈 수가 없다. 당장은 나를 위협하는 별다른 동기도 없고.
게다가 관계에 대해 설파하는 요즘의 심리학이나 자기 계발서들까지 이런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북돋아주고 부추기고 있는 풍조이다. 그냥 현대인들은 다들 이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상처받거나 외로워지지 않으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좋게 생각하자면 삶의 연륜으로 어느 정도 쌓인 자신만의 사람 감별 법조차도 기술이나 빅데이터를 통해 얻는 효용과 같은 맥락이라 여기며 삶에 활용해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
호기심이 많아야 창조적이고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고여있는 물은 썩을 수밖에는 없다. 나라고 처음부터 호기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이전보다 급격히 그것이 줄어드는 것을 어쩔 수는 없다. 머리로 그러지 말아야지... 나를 다독이며 노력해 갈 뿐이다.
사이코나 사기꾼, 연쇄살인마나 성격 파탄자 정도만 걸러내고, 가능하면 보다 다양하고 넓은 타입의 인간 군상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둘 수 있도록 하자. 결국 얽히고 설키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숙명 아니던가. 싫건 좋건 모든 기회와 행운도 사람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다. 상처받기 두려워하기보단 실체없는 두려움으로 시작조차 되지 못할 소중한 인연과 그들이 가져올 풍성한 추억들을 아쉬워해보자.
어차피 나 자신조차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 않는가. 머릿속이 온통 모순되고, 뒤틀린 수많은 감정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나약한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런 나라도 받아들이고 끌어안은 채로 조금이라도 드높은 이상을 향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듯, 타인들도 나와 다름없음을 인정할 수만 있다면, 호기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작정 타인에 대한 경계를 높이지 않는 정도는 가능할 듯싶다.
어쨌거나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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