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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Feb 02. 2021

미운 일곱 살? 죽이고 싶은 여섯 살!

아이는 그냥 크는게 아니야

육아는 아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부모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아이가 상속받는 것은 유전자나 유산만이 아니다.
아이가 받는 것은 궁극적으로 '부모의 삶' 그 자체다

김성찬, <부모가 되는 시간> 중에서


예로부터 '미운 세 살, 미운 일곱 살'이라고 했던가?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와닿지 않겠지만,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 시기가 부모에게는 얼마나 어마 무시한 공포와 시험의 기간인지를 알리!


내게는 그 '미운 세 살'이 엄청난 핵폭탄 급으로 나타났다가 영혼까지 탈탈 털고 지나쳐 갔더랬다. 그런데 그 눔의 '미운 일곱 살'이라는 참혹한 시련이 때이른 향년 여섯 살에 벌써부터 찾아와, 내 온몸과 마음을 시험에 들게 하고 있다. 신은 정녕 내 영혼을 단련시키기 위해 이 가차없는 채찍으로 나를 후려치시려는가? 그리하야 낮아질 때까지 낮아지도록 바닥으로 메치고 엎어치시려는 모양이다. 내게 육아란 어쩌면 이토록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란 말인가?


© priscilladupreez, 출처 Unsplash


여섯 살 여름 무렵 우리 아들은, 에고(Ego)인지 뭔지 모를 끔찍한 괴물이 몸속에 빙의되었다. 예전과는 색다른 양상으로 엄청나게 똥고집을 부리고 제멋대로 우겨대더니, 심지어는 엄마를 우습게 보며 말도 안 듣는 것은 물론 때리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ㅠㅜ


이전에도 육아가 결코 쉬운 적은 없었지만, 무슨 막돼먹은 깡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듯한 나날을 보내며 내 영혼은 그야말로 탈탈 털리다 못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매사에 엇나가며 '아니', '싫어'를 연발하고, 잘못을 해서 타이르면 도리어 적반하장식으로 토라져 화를 터뜨리거나 장난을 치며 무시한다. 정말이지 딱 갖다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해 나도 화를 내보지만, 그래봤자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아 어떻게 저 어린 것이 이토록 악마적으로 행동을 할 수가 있지? 부글부글 끓는다~


일순간 혹시 내 아이가 정신적으로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가슴이 철렁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가 그런 행동을 표출하는 대상은 대부분 엄마인 나이다. 지도 나름 가릴 건 가리는지, 유치원에서나 학원에서, 또는 다른 친구들에게는 그다지 폭력적이거나 삐뚤어지게 행동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다른 엄마들 얘기를 들어봐도 또래들에게 대체로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는 걸 보면, 우리 아이만 그런 건 아니고, 성장하며 제때에 올 것이 왔나 보다 싶어 다소 안심이 되기도 한다.


© anthonytran, 출처 Unsplash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래도 이성이 제대로 작동할 적 얘기고, 아이와 몇 시간씩같이 있다 보면 정말이지 빡돌아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이 계속 찾아오고 있다.


나름 초기 한 달 정도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를 받아주는 쪽으로 갈피를 잡았었다. 자아가 자라나서 자기 나름의 생각이 생기고, 독립적으로 되어가는 첫걸음이겠거니 하며 입술을 꽉 깨물고. 그래, 나도 어디서 보고 들을 건 있잖네. 이러다 나아지겠지, 이러다 나아지겠지... 만트라를 외우며 깊은 심호흡과 함께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주고 받아주다 보니, 이것이 점점 안하무인으로 바뀌어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엄마는 아주 우습고 안 무서운 사람으로 마음속에 자리매김을 한 모양이었다.

"엄마 바보야, 엄마 싫어, 그래봤자 안 무섭거든. 나도 알아."

어떤 상황에서 시작하든 결국엔 항상 이 말들로 귀결되는 하루하루가 늘어갔다. 으이구!


살얼음 판을 걷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세밀하게 예민하게 어떻게 해서든 아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해보지만, 어차피 아이는 화나거나 울거나 삐짐으로써 상황이 종결되고, 결론은 언제나

"엄마 싫어!"


그래 싫어해라, 으눔으 자슥. 나도 너 싫어!

나라고 이런 니가 좋겠냐? 엄마도 사람인데.

© Mandyme27, 출처 Pixabay


미운 일곱 살이라 했는데, 우리 아들은 미운 여섯 살이 되었다. 마음속에 어차피 짜증과 마음에 안 듬과 불만족의 씨앗이 들어있어서 뭐가 어찌 되었든 그것을 분노의 꽃으로 활짝 피워내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그걸 받아줄 사람은 고스란히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엄마의 비애. 몇 날 며칠을 이렇게 아이의 생떼에 고문당하듯 시달리다 보니, 어느덧 내게도 스멀스멀 우울감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아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다니! 엄마라는 역할을 맡으면서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줄 이전에 과연 상상이나 해본 일이 있던가? 참하기 싫은 역할이다. 다들 어찌저찌 애를 키우며들 살아가는지.


미운 여섯 살 시기도 벌써 이 정도인데, 사춘기라도 되고 중2병이라도 걸리면, 나는 정말이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확 도망가 버리고 싶다. 저 베란다 창을 열고 확 뛰어내리면, 혹시라도 창공이 나를 부드럽게 받아주어 새처럼 훨훨 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러면 이 모든 굴레를 벗어내고 내 인생이 혹시라도 리셋되어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이런 부질없는 상상도 살짝 해보다가 실없이 웃었다.


솔로몬 왕이 평생 반지에 새겨 되뇌이며 살았다는 지혜의 말.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 이 또한 모두 지나가고, 나는 언젠가 자유의 몸이 되리. 암 그렇고말고.

© nourwageh, 출처 Unsplash


다만 막상 자유의 몸이 되었을 적에 몸은 늙고 여기저기 쑤시며 정신은 나약해지고 모험심을 잃었을까 봐 두렵다. 어린아이 키우며 사는 지금이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눈부시고 행복한 시기임을 자각하고 더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테지만, 왜 나에게는 항상 이렇게 뭔가 모를 아쉬움이 가슴 한 편에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아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것을. 그냥 또 이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겠지. 피할 수 없는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에 맨몸으로 맞서는 조그만 고깃배처럼. 나는 그냥 정신줄을 또 놓아본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 마주할 때 언제나 내가 취하는 태도는 바로 이것이었다. 딱히 수가 없다면 그냥 휩쓸려야 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되는대로 시간 따라 상황 따라 그저 또 새로운 하루 내 할 일이나 하며 살아가기로 한다.


오늘 아침도 미운 여섯 살배기는 어르고 달래서 유치원에 차 태워 보냈다. 뭐가 어찌 되었던 아이가 집을 떠난 순간 나는 잠시 엄마가 아니다. 24시간 내리 엄마로서만 내가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잘 가 아들. 바이.

있다가 다시 만나기 전까지 나는 잠시 너를 잊겠어.


홀가분한 마음이 되자 잠시 대담해지며 예전의 내가 살짝 빙의되어 눈빛이 반짝거림을 느꼈다.

요 녀석, 니가 아무리 나를 쪽쪽 빨아대고 들들 볶아도 나 여기 살아있다. ㅇㅎㅎ

© elidefaria,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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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여섯 살 시절에 쓴 에센티아의 육아 일기입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을 위해 공감과 응원의 마음으로 이 글을 띄웁니다.


에센티아의 육아일기

https://blog.naver.com/yubinssk82/22222309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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