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센티아 Aug 04. 2021

혼자여도 꽤 괜찮았어

고독의 달콤함

달콤했던 나흘간의 꿀 같은 휴가는 어제부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래간만에 정말로 홀연 단신으로 지낸 며칠이었다. 미리부터 외롭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로 그랬다. 그래서 살짝 소오름이 돋아옴을 느낀다.



헉 나 혼자서도 아무렇지도 않잖아! 오히려 너무 홀가분하고 편했다고 한다면 같이 사는 식구들이 조금 섭섭하려나?



에이 아니야. 곧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랬던 거지. 그들도 나 없이 잘 놀고 잘 지내다 왔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 잠시 떨어졌다가 이내 곧 다시 만날 것을.

© ThoughtCatalog, 출처 Pixabay



그래 그래. 그러고 보니 기약된 잠시간의 작별 따위는 조금도 슬프지 않은 거구나. 딱히 그립지도 않을지 모른다. 어차피 다시 돌아와 지겹도록 함께 할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기약 없이 정처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이별이란 얼마나 가슴을 갈기갈기 헤집어 놓던가! 연애시절의 헤어짐이나 갑작스런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한 생이별 같은 것들처럼 말이다.


살면서 내가 겪어왔던 그런 무수한 이별들은 나를 상처 내고 좌절시키고 또한 덕분에 무디게도 해주고 단련시키기도 해 주었다. 마흔 해를 살아냈다는 건 그런 이별의 장막들을 하나하나 맨몸으로 다 거치고 뚫고 나온 생채기들이 온몸 구석구석에 흉터로 수도 없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덕분에 이제 웬만한 이별에는 움짤도 하지 않는다. 다만 영혼까지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진정한 이별 몇 가지만이 몸서리쳐지도록 공포스러울 뿐. 언젠가는 필시 나에게 찾아올 테지만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지 않아 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리고 부디 순리대로 순서대로 찾아와 주었으면 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 Free-Photos, 출처 Pixabay


그 밖의 작별에는 무덤덤한 심경이다. 온 세상천지가 연결된 요즘 같은 현실에서 그 옛날 한번 만났다가는 영영 찾지 못할 인연이 어디에 있겠는가? 대부분은 자유의지로 다시 만나볼 작정을 하지 않기에 연이 닿지 않는 것일 뿐. 그러니 이제 이별은 우리에게 그다지 애석할 일도 아닐지 모른다. 같은 공간에 꼭 있지 않아도 우리는 원하는 이들과는 언제라도 함께일 수 있다. 다만 그 함께 있기를 원하는 이가 좀처럼 많지 않을 뿐.


이런 얘기를 하면 너무 오만한 건 아닐까 싶지만, 혼자 있어도 하나 심심하지 않다. 볼 것 천지, 할 것 천지인 세상이니까. 그래서들 점점 섬처럼 고립이 되는가 보다. 아니 고립을 기꺼이 선택하는 모양이다.


더 솔직하게 나흘간 나는 조금도 화가 나거나 신경질을 부릴 일이 없었다. 실제 살아있는 사람과 엮이거나 섞일 일이 없으니 감정이 중립 기어에 놓여진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잔잔한 호수에 아무런 파문을 일으킬 돌멩이가 던져지지 않은 듯한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 2photopots, 출처 Unsplash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마트에 가거나 미용실, 백화점에 갈 일은 있어 밖에 이따금씩 나갔었다. 점원들과 상대하고 교류하는 그 건조하고 기계적인 커뮤니케이션 조차 엄청난 자극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스트레스란 어쩌면 그저 상대적이다. 더 큰 자극과 스트레스가 사라지면 기존엔 신경조차 쓰이지 않던 일이나 사람들의 존재감이 급부상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임계치에도 달하지 못하는 그 사소한 자극들은 머릿속에서 바로 잊혔다. 나는 평정심으로 회귀해 그렇게 집콕하며 지냈다.


© charlesgs, 출처 Unsplash


결국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그냥 나는 하얀 백지처럼 감정이 차오르지도 않고 잔잔한 상태인 거구나. 내 마음에 불꽃이 튀기 시작하는 것은 누군가가 존재감으로 나와 부대껴오니까 그런 것이었다. 끊임없이 남편 아이, 타인들... 수많은 존재들이 다가와 나와 부딪혀갈 때야 비로소 내 감정은 출렁거리는 거였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일평생을 그 누구와도 부대끼지 않고 독야청청 살아간다면? 그런 삶이 과연 내가 이번 생에서 살고 싶은 모습일까?


아니 역시나 귀찮고 꽤나 번거롭다 할지라도 인간들과의 갈등과 번민 속에서 부비부비 하며 살아가는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는 고요와 평정 따위 미쳐버릴 만큼 무료하고 지긋지긋할 날이 오지 않겠는가? 사람이란 원래가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니 말이다.

© matias_north, 출처 Unsplash


그래도 한 사나흘쯤, 길게 잡으면 한 2,3주쯤은 완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모든 심각하고 격렬했던 감정의 물결이 우습게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마음에 고여 부패해가는 감정과 쓸데없는 집착, 고집의 디톡스를 한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상당히 외향적으로 한 20여 년을 살아왔으니, 나머지 20여 년을 다소 내향적으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스킬이 녹슬어 버려 감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들지만, 다행히 지금부터의 세상은 오히려 외향인들에게 어느 정도는 불리한 형세가 되어 가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히 도 나는 우세한 시대적 대세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선택한 것은 아닐까? 환경에 무섭게도 잘 적응하는 카멜레온 같은 형질이 어쩌면 내 속에 있는 탓으로.

© jmuniz, 출처 Unsplash


당분간 내게 혼자 있는 시간은 허락되지 않을 것 같다. 아이의 방학, 코로나로 인한 남편의 재택근무로 세 식구가 한 집에서 또 복작거리며 지내게 될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은 복받쳐 오를 테고, 조급한 마음, 짜증에 안달까지 오만가지 파문이 내 마음의 호수에 일어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여지껏 다 해내 온 방식인데 뭘. 그렇게 시달리며 리얼하게 얽히고설켜 살기로 모두 다 이 내가 선택한 길이다. 무를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나를 달달 볶는 만큼의 기쁨과 만족감도 항상 내게 주는 존재들. 아니, 언제나 좋은 쪽이 나쁜 쪽보다 큰 수지타산이 맞는 장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해내고 있는 거다. 그러니 괜찮다. 흑백논리로 대답을 종용받는다면 나는 어디까지나 행복하다.


이 본질의 고삐를 마음에 단단히 붙들고 오늘도 복작복작 지지고 볶고 하는 일상의 한가운데로 나는 향한다. 이 익숙한 스트레스, 신경 쓰임, 조바심. 그래 여기가 바로 내 자리다!

© jimmydean, 출처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있는 시간의 마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