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센티아 Jul 03. 2020

타인의 아픔에 구원 받다

내가 읽고, 또 쓰는 이유 

수많은 책과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느끼는 순간은, 글의 행간에서 바로 '나'를 발견해 낼 때다.

작가의 이야기가 내 삶이나 처지와 너무 닮아 있을 때, 그야말로 내가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 문장으로 적혀 있을 때, 그 기적 같은 순간에 글은 영혼을 뒤흔든다


우연히 너무도 폭풍 공감되는 글을 만나면, 이걸 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집요하게 추적하게 된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내 영혼의 쌍둥이같은 이 사람을 당장에라도 만나고 싶다.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말이 너무나 잘 통할 것 만 같아서다. 어쩜 나도 이렇다고, 나도 꼭 이렇게 느꼈다고. 내 마음을 사정없이 쏟아내면 한없이 받아줄 것 만 같다.  


물론, 실제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그런 식의 반응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할 것이다. 가슴 벅차 철철 눈물을 쏟아낼 정도로 마음이 감동의 도가니 상태가 된다한들, 적극적으로 그런 마음을 표현해 본 일은 없다. 기껏해야 속으로 조용히 팬이 되어 응원하며, '좋아요'와 '구독하기' 버튼을 꾸욱 누를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잠자코있기에

나는 수많은 글로인해 너무도 큰 구원을 얻었다!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초라한 기분이 밀려들때, 외롭고, 고단하고, 절망에 침잔될때, 그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이 적어낸 고통의 기록이었다. 그들이 남긴 괴로움의 핏방울과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문장 만이 실은 가장 내게 힘이 되었다. 




내가 읽는 이유


날이 갈수록 뜨거운 열정이나 활기와는 아주 조금씩 멀어지고있는 걸 느낀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안정되고 차분한 일상을 채워나가기 위해, 내게는 감사와 만족, 그리고 의미가 필요하다. 이런것들을 오로지 내 삶의 이야기만을 통해 짜낸다는 것은 역부족이다. 


감사, 만족, 의미... 삶의 이런 최상의 가치들은 혼자서 자기 암시와 정신승리로 끝도 없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결국, 남들의 이야기로부터 수혈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기록에서 나는 박쥐가 피를 빨 듯, 인생에 필요한 본질과 정수를 쪽쪽 뽑아낸다. 말보다는 글에서 나는 이 작업을 훨씬 유능하게해낸다. 

그래서 시도때도없이 읽고 또 읽는다.


내가 읽는 이유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로부터 삶을 살아낼 지혜와 희망을 얻어내기 위해서다. 

이렇게 적고보니 자칫 본질이 왜곡되어 너무 숭고하고 아름답게 들리는데,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타인의 불행과 실수를 보며 스스로가 구원을 얻고 싶어서다!


'잘들 살아내는 것 같이 보여도 인생살이는 다들 고단하구나.' 

'이 사람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다행이다.'

'저렇게 하다가는 망하는구나, 나는 절대로 저러지 말아야지.'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남들의 시련과 좌절의 고백은 내 삶에 대한 감사와 만족을 되새길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강력한 처방전이다. 그들의 미끄러짐과 고꾸라짐을 통해 나는 삶의 지혜와 희망을 얻는다. 정보나 지식을 흡수하기 위한 실용서적이 아니라면, 나는 대체로 이런 목적으로 읽을거리를 찾아 헤메인다.


사람이란 뇌속의 '거울 뉴런' 덕분에, 다른 존재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그렇기에 글을 읽는 행위도 가능한 것이다. 글을 통해 작가의 정신에 빙의하고, 그가 느낀 감정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기에 '간접 경험'을 한다고 말한다.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면, 종이 위에 써진 그 글은 자신에게는 별 의미 없는 활자에 불과하다.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일 뿐.


그래서인지, 승승장구 성공스토리나, 자기계발서 같은 것을 보면 되려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런걸 읽으면 향상심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일이 많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자괴감이 밀려오는 부작용이 나타나곤한다. 유치하게도, 그 사람은 대체 몇 살에 그런 도약을 했고, 성공을 이뤄낸 건지를 따져보며 나와 비교하기 시작한다. 내 상황이나 처지와 접점이 잘 찾아지지 않으면 가차없이 책을 덮어버리기도 한다. 


이제는 아무 글이나 읽고싶지 않다. 내 영혼을 조금도 건드려주지 않는 글에는 눈길조차 줄 여유가 내게는 없다. 내일모레면 나는 마흔이니까. 

더이상 아무거나 읽고 있을 시간은 없다! 


출처: © DariuszSankowski, Pixabay




타인의 아픔으로 구원받는 것이란


살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불행을 목격한다. 그리고 동정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한편, 의식 깊은 곳에서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것이 나에게 닥친 불행이 아닌 것에 감사하고, 같은 실수에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내 삶을 더 소중히 살기위한 이정표로 삼는다. 누군가의 성찰과 아픔의 기록 덕분에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 삶을 조망해본다. 


어떨 땐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며 데자뷔 같은 느낌에 짜릿해한다. 

너무나 반갑다. 나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딱 내이야기인데!

그렇게 가슴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긍정적인 감정이기보다는 아픔이거나 상처일때, 공감 지수는 그야말로 몇 곱절 배가된다. 어느덧 심연에서 서서히 치유가 시작된다.


예전 일본에서 유학 시절 봤던 드라마 중에 '고교교사 (TBS, 2003년 작)'라는 작품이 있었다. 

악성 뇌종양에 걸린 어느 고등학교 남자 교사가, 우발적으로 제자인 여학생에게 자신의 검사 결과를 노출시킨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여학생은 그것이 자신의 검진 결과라고 착각을 하게 되며 혼란이 빚어진다. 그 소녀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철썩같이 믿으며, 한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교사는 처음엔 큰 악의 없이 그 소녀를 그냥 착각한대로 믿게 놔두었다. 어차피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그 소녀는 곧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니, 잠시 동안 착각한 들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정작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자신이 곧 죽을 처지라고 믿게 된 제자를 지켜보면서, 교사는 묘한 쾌감을 얻게 된다. 자신이 죽음을 받아들이며 마음속에 일어났던 반응이 그대로 그녀 안에서 재현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소녀는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한 채, 교사에게만 죽음을 맞는 자신의 심경변화를 고백하며 일상을 지낸다. 교사는 마치 멘토처럼 그녀의 고백을 들어주고 조언을 하며, 자신의 영혼이 치유를 얻는 신기한 체험을 한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치유 이상의 '구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경험하는 엄청난 불안과 고통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하는 그 기묘한 카타르시스의 감정.


그게 어떤건지 이제는 나도 구구절절 알 것만 같다. 다른 이들의 글을 읽으며, 나 역시 이런 감정을 수도없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아픔에 신음하는 글 속에서, 한때 그런 비슷한 인생의 함정에 빠져 절규하다가 생을 내팽개쳐버리고 싶었던 내 심정을 그대로 바라본다. 피 토하는 듯 써 내려간 문장들 속에 그 시절 나의 아픔과 삶이 또렷하게 읽힌다. 설명할 수 없는 쾌감이 느껴진다. 


내가 느꼈던 그 아픔을 누군가도 느껴봤구나. 나 혼자가 아니었던 거다. 더는 외롭지 않다. 

어느덧 그 아픔에서 나는 스르르 해방된다.


2003년도에 일본 TBS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고교교사'


내가 쓰는 이유


다른 이의 불행과 힘든 마음의 기록을 보며, 구원을 얻고 용기를 얻는다는 것이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드라마에서 교사가 제자에게 한 짓은 명백히 선한 행위가 아니었다. 죽을 운명이 아닌 소녀가 거짓을 믿도록 방치하고, 그로 인해 좌절과 두려움 속을 헤매며 방황하게 놔두었다. 심지어 그로 인해 자신은 뒤틀린 쾌감까지 얻으며 위안을 얻었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교사와 소녀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런 사실에 갈등하다가, 결국 진실을 밝히며 교사가 죽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교사는 소녀를 통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을 느끼며 '자기 연민'을 사랑이라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느꼈던 죽음의 공포와 절망을 그대로 느끼는 그 어린 영혼을 보며, 그녀를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우리가 글을 읽고 구원을 얻는 행위는 이 교사처럼 이기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리라.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오로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셀프힐링(self-healing)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글로 써낸 상처를 딛고 일어선 독자가 삶에 대한 감사나 깊은 위로를 얻었다고 해서 괴로워할 작가는 없다. 오히려 누군가가 자신의 글로인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을 쓴 이에게 그보다 더 큰 기쁨과 영광은 없으리.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그것이 어떻게든 생명을 얻어야만, 그 글은 존재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쓰는 목적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니까.


때론 나도 부끄러운 과거나 실수를 고백하거나, 치부와 약점을 드러내는 글을 쓴다. 누군가는 그 글을 읽고 우월감을 느끼거나 안도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내 글이 되도록 많이 읽히기를 소망한다.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불행한데, 그나마 나는 이 정도니 다행이다.'  

'저 사람은 인생에서 저런 식으로 미끄러졌다니,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내 글을 일고 설사 이렇게 생각한 이가 있다한들, 내 영혼은 손톱만큼도 초라해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라도 내 글은 생명력을 얻은 것이며, 이 세상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기에. 무엇보다 손가락 끝에서 눈물을 철철 흘리 듯 글이 다 흐르고 난 뒤, 나는 그 사유와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진다. 

그것 만으로도 내게는 써야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출처: © kaitlynbaker, Unsplash




내가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그 속에서 내 모습이 비치는 거울의 파편을 보았 듯, 다른 사람들도 내 글 속에서 그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거울뉴런으로 누군가가 내 삶을 비춰주는 한, 이 땅위에 내 영혼은 더이상 혼자가 아닌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살고, 이렇게 느끼는 대로 그 누군가도 그대로 경험해 본 일이 있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생의 카타르시스와 무한한 위안을 얻을 수 있으리.


자, 이제부터 들려줄 나의 아픔을 딛고 당신도 부디 구원을 얻으시기를...


출처: © mili_vigerova, Unsplas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 날아오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