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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Jan 21. 2017

롤랑 바르트, 슬픔의 권리

<애도일기>와 <카메라 루시다>에서의 어머니

마르셀 프루스트를 읽다가 롤랑 바르트를 거쳐가야 할 것 같아서 옆 길로 빠져나왔다. <애도일기>를 한번 읽었을 때는 그저 순결하고 절대적인 슬픔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김진영 선생의 인터넷 강의를 들어가며 다시 한번 읽어 가니 바르트가 말하려 했던 전체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르트의 슬픔은 프로이트가 말한 애도나 멜랑콜리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상실된 대상 앞에서 애도는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멜랑콜리는 자신을 대상으로 대체한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잃은 바르트의 슬픔은 대체가 불가능한 무엇이다. 그 상실이 남긴 부재의 공간은 ‘패인 고랑’으로 남는다.


“-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패인 고랑.” (<애도일기> 1977. 11. 9.)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는 사진 속에 있는 어머니와의 재회를 말했다. 

“나는 그 속에서 어머니의 거동. 건강. 밝은 표정과 ”다시 만났다”.” (<밝은방> p.84)


하지만 <애도일기>에서는 슬픔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어간다. 바르트는 그만 슬퍼하라며 슬픔의 권리를 빼앗으려는 코드화된 시스템을 거부하고, 슬퍼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래서 애도나 멜랑콜리와는 달리, 슬픔을 정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무너뜨리고 포기하는 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타 노바’(Vita Nova)를 통해 이전의 삶과 단절된 새로운 삶의 주체로 태어난다. 바르트에게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애도의 글쓰기였다.


말기의 바르트는 자신이라는 주체를 사회적 개인으로 환원하기를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을 필요한 저항을 통해 재구성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밀함을 드러내지 않고 내면성을 말하고 싶다.”(<밝은방> p.122) 


바르트는 코드 시스템이 요구하는 보편이 아닌, 개인의 특별한 내면을 우선했다. 그래서 가능한 것이 <애도일기>였을 것이다. <애도일기>를 처음 읽었을 때 가졌던 의아함, 최고의 지성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마치 어린 아이처럼 이렇게까지 슬퍼해야 했던 것인가라는 질문이 풀리게 되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코드에서 벗어나, 평범성을 거부하고 나만의 특별한 내면을 지키려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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