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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Mar 11. 2018

자기 배려를 통한 성숙한 실천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제가 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의 내용을 브런치에 맞게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전체 글은 책을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내가 너에게 말하는 진실을 너는 내 안에서 본다.”


세상과 나의 관계는 언제나 고민거리였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은 이후 ‘세상’과 ‘나’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세상을 우선하면 이타주의이고, 나를 우선하면 이기주의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나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 마치 죄를 짓는 듯한 마음이 들어 자기 자신을 버리다시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세상을 위해서 나를 잊고 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를 찾고 싶은 욕구는 강해져만 갔다. 마치 자신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정신없이 살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비로소 시선이 자기로 향하는 현상은 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자아, 그리고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한 정신사를 갖고 있던 나에게 미셸 푸코의 마지막 강의들은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자기 배려


『주체의 해석학』은 푸코가 그의 말년인 1981~1982년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들을 모은 책이다. 푸코는 이전까지 다양한 사회적 기구에 대한 비판, 특히 정신의학, 의학, 감옥의 체계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왔다. 특히 『감시와 처벌』을 비롯한 1970년대의 저술들은 권력의 문제를 지배의 관점에서 다루어왔다. 그러던 푸코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윤리적 주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점검과 자기 수련을 거쳐 만들어진 ‘윤리적 주체’에 의한 새로운 실천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푸코가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의 강의에서 집중한 것은 주체와 진실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푸코는 먼저 ‘자기 배려’ 개념을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 배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행위”다. 그는 자기 배려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위해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그리스의 격언에 대해 설명한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입구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철학적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었다. 신의 견해를 들으러 신전에 온 사람들로 하여금 미리 생각하여 적절한 수의 질문만 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결코 도를 넘어서거나 지나침이 있어서는 안 됨을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이 자기 배려와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자신을 망각하지 말고 돌보며 배려해야 한다는 말로 푸코는 해석한다. 그래서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는 소크라테스가 인용했던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과 연결되어 있다.


고대인들이 던졌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나를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가?”였음을 푸코는 강조한다. 그들이 물었던 것은 자기를 단지 인식하는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행동의 문제였다. 고대인들의 그런 질문은 말과 사유가 아니라, 자신을 변형시키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푸코와 맞닿아 있다.


파레시아진실을 말할 용기


따라서 푸코의 자기 배려는 주체의 시선이 내부로 향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주체는 자신을 변형시킴으로써 새로운 비판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구축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이 ‘파레시아’다. 


푸코는 1983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 강의에서 파레시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발전시킨다. 고대 그리스어인 ‘파레시아’는 ‘솔직히 말하기’ 혹은 ‘진실을 말하는 용기’라는 뜻이다. 파레시아를 행하는 자인 파레시아시스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자다. 그는 모든 것을 말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타인에게 활짝 열어 보인다.


파레시아시스트는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고 믿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며, 진짜로 진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파레시아에서는 신념과 진실이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파레시아시스트는 위험을 감수하는 자다. 


“정치적 논쟁에서 한 연사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과 반대되거나 정치적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 인기를 잃을 위험이 있는 경우, 그는 파레시아를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파레시아는 위험에 맞서는 용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파레시아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러한 파레시아는 자기 배려가 비판적 실천으로부터 도피하여 이기주의와 안락함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을 막아준다. 자기 배려가 집단적 도덕을 지탱할 수 없는 개인의 자폐 상태가 아니라 자아와의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방법이라면, 이 자기 배려의 시작은 바깥으로 표출되는 단호하고 솔직한 말의 반복, 그러니까 파레시아 덕분이다. 결국 자기 배려를 통한 주체의 변화는 파레시아라는 용기 있는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의 자기 배려가 권력 비판의 장을 포기하고 개인적 윤리의 장으로 피신했다는 해석은 잘못이다. 그는 자기 배려를 통해 변화된 주체가 자기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타자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여, 파레시아라는 보다 성숙한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푸코는 영혼과 용기를 강조한 소크라테스를 자기 배려와 파레시아의 완벽한 결합이라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배려의 인물이며 후세에도 길이 그렇게 남을 것이다.”


젊었을 때 격정적이었던 사람도, 나이가 들고 나면 자기를 돌보고 마음의 평온함을 찾고자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것을 세상으로부터의 후퇴나 철수라고 보면 일면적인 해석이다. 푸코가 말했던 ‘자기 배려’가 그것을 설명해준다. 푸코가 말년에 했던 얘기들은 그 역시도 그런 삶을 통과했음을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자기 배려


고대로부터 자기 배려의 역사를 찾았던 푸코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영혼은 돌보지 않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던 소크라테스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자기를 돌봐야 한다고 말한 푸코의 이야기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는 정언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연마하는 일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본이 되는 일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간과한 채 그 시간을 놓치곤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먹고살기 위한 생존과 경쟁에 파묻혀서 시선을 자기 내부로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생존에 급급하여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그러한 환경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달라진다는 보장이 없다. 놓쳐서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을 기회는 영영 없을지 모른다. 지금 나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돌봄이 없는 삶은 내면의 성장을 제약하여 삶의 기초를 부실하게 만든다. 자기 수련의 과정에서는 단지 미래를 위해 유용한 인간이 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약하는 환경과 평생 동안 싸울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삶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다. 진실된 주체로서의 자신을 만나는 것은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일과 같다.


푸코가 말한 자기 배려를 통한 파레시아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선다. 보수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진보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고위 관리, 정치인, 교수, 언론인도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자기 수양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태도조차 갖추지 못한 채 거대한 담론을 외친다. 자식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서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저주의 욕설을 퍼붓는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겠다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자기 배려의 노력이 없는 삶에서는 진실한 주체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한 주체가 쏟아내는 말은 진실성 없는 수사에 그칠 수밖에 없다. 자기 배려에 대한 강조가 단지 개인의 인격 수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푸코가 충분히 설명해주었다.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고 돌보며 채워나가는 일은, 세상을 향해 진실한 행동을 하기 위한 재출발점이다. 내가 채워져야 세상이 채워진다. 

 


 우리는 왜 나이 들어서야 자신을 바라볼까

 

나이가 들어서야 자기 내부로 시선이 옮겨가는 것, 나도 그랬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이 넘쳤던 젊은 시절, 자기를 돌보는 것은 미뤄두었다. 대의를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채워야 할 감성과 생각들을 건너뛴, 그래서 결핍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에 갇혀 살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외부의 세계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내가 나이 들어 뒤늦게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러한 결핍에 대한 반성의 결과다. 세상을 향한 나의 어떤 목소리도 내면에서의 자립적이고 반성적인 사유를 거쳤을 때 의미가 있다. 그래야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껴안는 나의 목소리가 가능하다. 이제라도 더 많은 것을 읽고 보고 듣고 느끼고 싶다. 그래서 따뜻한 영혼을 간직한 윤리적 주체가 되고 싶다. 


푸코는 자기 점검과 자기 수양을 거친 윤리적 주체가 진실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진실한 주체가 비로소 진실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사람일수록 먼저 자신을 바라볼 일이다. 삶을 감당해나가는 힘도, 더 넓고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거기서부터 나올 수 있다. 자기 배려에 관한 푸코의 말이 오늘 이곳의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그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의 내용 전체는 제가 쓴『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당신의 영혼을 흔들고 찌를 12권의 책

읽고 사유하는 사람만이 싸우고 사랑할 수 있다"


저자 유창선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 책 12권을 소개한다.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고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탐구 기록이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위대한 사상가와 온몸으로 만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의 부활정치적 사유능력과 실천능력의 복원이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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