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했어요
1997년 4월의 어느 날, 나는 예정일보다 3개월이나 앞서 태어나게 되었다.
7개월 만에 태어나 한 달 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살게 되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유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할머니는 나를 유리라고 이름을 지어주셨다.
한 살 터울인 우리 오빠는 철학관에서 그 당시 10만원이라는 돈을 주며 비싼 이름을 지었는데, 나는 더 값진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 우리 아빠는 엄마 옆에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서 보니 그새 술자리에 가있었다고 한다.
우리 오빠가 태어나던 날에도 아빠는 어김없이 술자리에 갔고, 내가 태어나던 날에도 어김없이 술과 함께 했다.
이러한 아빠와 이혼하지도 않고, 자신의 업이라며 아직도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일도 하고, 육아도 하고, 학교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도 않고 와주었다.
어린이집을 다닐 때도,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도 엄마는 혼자서 우리 둘을 데리고 해운대, 광안리, 놀이공원, 동물원을 데리고 다녔다.
워낙 가만히 있지 못했던 나는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를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매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안전하게 엄마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엄마의 보살핌 덕분인지 유년기가 우울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춘기가 오면서 술 취한 아빠와 싸우는 일이 많아졌고 그렇게 내 우울감은 점점 쌓여만 갔다.
단순히 술만 많이 마셨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았을 거다.
술을 마신 후 나오는 폭력적인 모습과 폭언에 나는 술 취한 아빠는 더 이상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고, 짐승으로 여기게 되었다.
남이 보았을 때 패륜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술 취한 아빠한테 좋은 말이 나올 수 없었고 받는 스트레스를 말로 풀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결국 아빠는 술이 깨고 나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할뿐더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을 했다.
나는 그 순간 받는 스트레스에 막말을 퍼부어도 결국 아무렇지 않은 아빠를 보면 답답하면서도 죄책감에 빠지기도 했다.
나쁜 아이, 나쁜 딸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우습게도 아빠가 술에 안 취해 있을 때는 정말 아빠랑 잘 지내었다. 하지만, 좋은 순간이 쭉 지속되지는 않았다.
아빠랑 한창 재밌게 잘 놀다가도 아빠 입에 술이 들어가는 순간 나는 천하의 나쁜 딸이 된다.
20대 초반까지는 술 취하지 않은 아빠와 그래도 잘 지내었던 것 같다.
때로는 아빠가 술을 끊겠다며 6개월간 금주를 하기도 하고, 나는 또 아빠가 술을 끊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친오빠와 함께 “요즘 아빠 좀 조용하네.”, “아빠 술 안 마신 지 좀 됐네.” 라는 말을 하면 누군가가 우리를 놀리듯
어김없이 아빠는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다.
아빠가 술에 취해 폭언이 오가면 나는 울면서 잠들기 일쑤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 우울함에 미쳐버릴 것 같아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답답할 때 일기장을 펼쳐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나마 일기를 적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우울의 극에 달했을 때 내가 차분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20대 후반인 지금은 아빠가 술을 거의 안 마시고 있지만, 아빠와 얘기를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아빠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다시 아빠와 화기애애하다 폭언을 주고받으며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너무 지쳐버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아빠한테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20대 중반에 더더욱 아빠한테 실망한 일이 많았기 때문인데,
이 이야기도 차츰 풀어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