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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토 Dec 04. 2020

"사실, 이건 내 선물이야"

Bravo My Life

피아노를 구입했다. 후기를 읽어보니 전자피아노지만 제법 업라이트 피아노 소리와 가깝다고 했다. 어찌 되었던 좋았다. 미국에서 손가락이 튕겨 나올 만큼 가벼운 전자피아노도  즐겁게 쳤는데 어차피 전문가도 아닌 막귀에는 어떤 것이든 그쳐 칠 수만 있다면 좋았다. 하얀 피아노를 거실에 들여놓고 살포시 뚜껑을 열어 건반을 눌러보았다. 묵직한 느낌이 들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이 느낌이야. 손가락이 날아다닐 듯  가벼운 이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피아노 설치가 끝난 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던 나를 보고 아이들이 물었다.

"엄마, 근데 피아노는 왜 샀어?' "응?, 이건 엄마 선물이야. 엄마가 엄마에게 주는 선물."




미국에 가기 전 내게는 20년이 넘은 피아노가 한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기억 속에 피아노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지금처럼 보급형 전자피아노를 편하게 구입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는 일은 분명 꽤 목돈이 들어가는 일이었을 게다. 그래도 다른 부잦집 딸들처럼 집에서 우아하게 음악을 연주하는 자식의 모습을 상상했을 아빠는 사우디 현장에서 벌어온 돈을 딸을 위해 지출하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어느 날 작은 내 방에 커다란 갈색 피아노가 들어왔다.  처음엔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했지만  음악에 큰 재능이 없는 나의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피아노는 종종 방 한구석에 방치되어졌다. 엄마는 공부하며 스트레스받는 딸이 피아노를 치며 그것을 이겨낼거라 기대했지만 그 또한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을 뿐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부침이 많았던 아빠의 사업 덕에 두어 번 집안에 빨간딱지가 붙었을 때도 용케 피아노는 살아남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오랫동안 뚜껑이 열릴일은 없었지만 엄마는 때가 되면 전문기사를 불러 조율을 부탁했다. 그건 언젠가부터 엄마에게 꼭 지켜내야 하는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오랜 서울 살이 뒤에 경기도로 이사를 갈 때도  당연히 피아노는 함게했다. 수많은 이사 속에 피아노 운반과 조율은 항상 지출을 오버시켰고 나는 그럴 때마다 팔아버려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엄마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내가 결혼을 하고 잠시 조카들을 위해 언니 집에 가 있던 피아노는 우리 아이들이 생기고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 둘이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면서 그 오래된 피아노는 모처럼 활기를 찾았고 종종 집안에는 서툰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국에 가야 하면서 피아노는 다시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친정집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2년간 우리 집을 보관해주겠다던 시아버지는 굳이 피아노까지 보관해야 하냐며 불편한 내색을 비치셨다. 엄마는 "너희가 불편하면 그냥 팔아야지 뭐"라고 하셨지만 그 말끝에는  서운함이 뚝뚝 떨어졌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친정집으로 옮겨야 하나 몇 날을 고민하던 어느 날 주말 부부였던 남편이 집에 돌아와 지지부진한 내 고민에 마침표를 찍었다.  남편의 전화 몇 번에  반나절도 되지 않아 나의 피아노는 중고가게행이 결정되었다. 팔았다기 보다는 팔아치웠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의 20년도 넘은 피아노는 그렇게 팔아치워 졌다. 피아노를 가지러 올 중고 매매업자를 기다리며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오랜 친구를 보내는 것에 대한 예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미국에서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 가족에게 밥 한 끼를 사주곤 전자피아노를 받았다. 내 오랜 피아노 같은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없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통증처럼 느꼈던 나는 아이들보다 더 신이 났다. 미국 생활은 여유로울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매일 도시락을 싸고 하루의 3분의 1을 아이들 라이딩에 보내야 했지만  혹시 몰라 한국에서 가져온 딸아이의 피아노 책을 보며  피아노에 앉아 소리를 내는 시간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귀국을 이주일 남겨놓고 그 전자피아노는 주변의 다른 가족에게 보내졌다.


한국에 돌아와 이사를 마치니 다시 피아노가 그리워졌다. 올 한 해 나라를 뛰어넘고 지역을 뛰어넘는 여러 번의 이사로 긴축재정을 해야 한다는 머릿 속 이성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피아노가 가지고 싶냐고 넌지시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미지근하기만 했다. 아이들이 마구 졸라 대야 마지못해 사는 척이라도 할 텐데 ... 졸라대지 않는 아이들이 야속하단 생각을 하며 피곤으로 쩌든 얼굴에 로션을 바르다 화장대 거울을 올려보았다.  올해 여러 번의 이사로 녹초가 된 내가 붙여놓은 스티커가 인사를 한다.


"당신, 참 예쁘다."


지치고 힘든 마음을 차마 내보일 곳이 없어 나에게 도닥여준 한마디였다. 이 글을 볼 때마다 한동안 왈칵 눈물이 쏟아졌었다. 이제 눈물대신  수고한 나에게 선물을 해볼까 하는 마음이 저 구석에서 스멀스멀 쳐들고 올라온다. 20년 넘게 나와 함께해준 보고 싶은 내 옛 친구를 다시 만날 수야 없겠지만 허전한 마음을 새로운 친구와 함께할 수는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낯설기만 한 이 도시에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올 한해 많은 일을 이겨내고 여기 서 있는 나를 위한 선물이다. 조심히 덮개를 열어  쇼팽의 이별곡을  한 음계씩 느릿느릿  눌러본다. 이건 분명 내가 아는 쇼팽의 그곡은 아니다. 하지만 어떠랴. 인생 2막이 이제부터 시작이니 천천히 가다보면 언젠가 이 서투론 손가락이 매끄럽게 건반 위로 노니는 날도 오지 않을까?. 나는 오늘 또 꿈을 꾼다. 백발이 되어 멋지게  쇼팽을 연주하는 나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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