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와 나의 리추얼 데이즈
자잘한 파도에도,
큰 파도에도 마음은 부서진다.
조금씩 혹은 한꺼번에 많이.
부서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무서운 일이다.
(...)
매일 아침 생겼다가 저녁이면 부서지는
어떤 마음들처럼.
그때의 나에게, 혹은 소설 속 할머니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게 완벽한 삶이라고.
완벽한 인생이란 완벽하지 못한 것들,
못난 것들, 부서진 것들까지도
모두 아우르는 삶이라고.
지난달에 읽은 김연수 작가의 책 <디 에센셜 김연수>에서의 한 구절입니다. 완벽한 인생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는 것에 공감을 했습니다.
최근에 인기 있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도 주인공의 반복되는 하루를 디테일하게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책 속의 문장과 딱 연결이 되는군!'
도쿄의 화장실 청소일을 하는 주인공은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떠서 양치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주말에 깨끗이 세탁해 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주차장의 자판기에서 같은 브랜드의 캔커피를 마시고 도쿄의 화장실을 청소하죠.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공원 벤치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나무에 비친 햇살을 필름카메라로 찍고...
별다를 게 없는 하루지만 충실하게 자신이 만들어놓은 하루의 일과들은 귀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주말에 들리는 단골가게라던가, 중고서점에서 한 권씩 고르는 책, 찍어둔 필름을 현상해서 박스에 조금씩 모아둔 것이 옷장 한켠에 꽉 차있는 모습이라던지.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완벽한 하루를 위해 스스로 만든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는 리추얼이 된 아침에 낙서하기. 1년 전부터 '밑미'라는 리추얼 플랫폼에서 무언가를 끄적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고 있는데, 오늘은 그 기록을 남겨보려고 해요.
2024년 1월부터 7월까지는 버리기 아까운 패키지나 날짜 지난 달력을 표지로 활용해서 30장짜리 노트를 만들어서 매달 한 권씩 기록했어요. (손때 묻은 표지가 그 어떤 노트들보다 맘에 듭니다)
그전에는 얇고 작은 노트들을 주로 썼습니다. 매달 그리고 싶은 게 있는 달도 있고, 아닌 달도 있고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점심때마다 필름카메라로 햇살 비친 나무를 찍는 주인공처럼 맘에 드는 사진으로 나올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일단 계속 찍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요.
최근에는 인덱스카드 활용법이라는 것을 어디선가 듣고 나서 저만의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있어요. 노트보다 카드에 써서 모아놓고 보면 더 넓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아마도 하반기에는 이런 식으로 낙서를 끄적여볼 것 같아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1. 종이조각에 자유롭게 낙서를 하고
2. 박스나 나무 상자에 모아둔 뒤
3. 꽉 차면 꺼내서 본다.
잘 그리고 싶은 마음에 괴로운 적은 많았지만 그리기 싫은 날은 없었습니다. 매달 하고 싶은 것도 달라서 그 생각을 들여다보기 좋았어요. '오, 나 요즘 이런 게 필요했군' 하면서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여행을 가도 리추얼은 계속하는 겁니다.
방해하는 일들은 계속 생기고, 하려고 했던 마음은 짜게 식기도 하니까요. 1년 동안 모아놓은 기록들을 쭉 살펴보고 나니,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았습니다. 주로 책이나 영화에서 '듣고 싶었던 말들'을 메모하고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뭔가를 하고 싶어 지게 만드는 말들을 나도 모르게 계속 기록해두고 있었고, 그렇게 조금씩 하루하루를 만들고 좀 더 나은 하루가 된다는 사실.
+
도쿄올림픽 때 만든 아름다운 화장실을 기록해 두려고 독일의 감독 빔 벤더스에게 의뢰해서 만들게 된 영화라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신기했지만,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를 아카이빙 해둔 사이트도 대단합니다. 들러서 구경해 보세요.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