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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Apr 06. 2022

가족 이야기

남동생을 먼저 보냈습니다

재작년 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 남동생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5개월가량 우리 집에서 호스피스를 받으면서 말기암의 고통을 겪어내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도둑처럼 홀연히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남동생은 나에게 참 낯선 존재였습니다. 

5녀 1남의 형제들 가운데, 넷째 딸인 내 밑으로 2년 터울로 태어난 남동생은 우리 집에서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바로 위의 나는 어려서부터  톰 보이처럼 자랐고 늘 ‘착하고 말 잘 듣는  넷째 딸’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나였어야 했습니다. 

온 식구들 관심 속의 남동생과 무관심 속의 나, 우리 둘은 자라면서 서로를 소 닭 보듯이, 닭 소 보듯이 했습니다. 그마저도 내가 대학을 가면서 서로에게 더 무심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남동생은 뭐랄까, 모두가 여자인 형제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겉돌면서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는 남동생에게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동생의 친구들이 누군지, 관심사항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바로 위의 누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우리 둘은 각자 청년기, 장년기를 보내고, 돌고 돌아  이곳 미국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다시 만난 동생은 혼자였습니다.

거친 이민생활로 가족 갈등을 빚다 가족 모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동생만 남아있었습니다.

홀로 남겨진 동생 곁에는 작은 교회 공동체가 자리를 잡았고 동생은 그 공동체 돌보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하며 소박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누나인 나는 아들딸 대신 교회를 가족으로 여기는 동생이 많이 못마땅했습니다.

동생은 찡그린 얼굴의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남들 사는 만큼만이라도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3년 전 10월 어느 날 연락이 왔습니다. 직장에서 쓰러져 워싱턴 디시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말기 암. 그것도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그래서 호스피스를 받아야 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처음에 나는 많이 당황했습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되도록 왜 나는 모르고 있었던걸까?

그동안 동생이 가족처럼 돌보며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지? 

병원에서는 의사결정권자로서 '나'를 지명했습니다.

생명유지장치를 쓸지 말지 결정할 사람이 '나'라고 했습니다.


당황스러운 가운데 나는 점점 화가 났습니다. 

왜 '나'이어야 하지? 하느님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이지?...


동생은 그렇게 다시 내 삶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동생이 살던 집으로 퇴원을 시키고 삼시세끼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더 이상 일을 못하니  집 렌트비를 대신 내고,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호스피스 널스와 만나고,

동생의 전 아내와 딸아이가 한국에서 방문해 동생과 함께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면 호스피스센터로 다시 입원을 시키고, 좀 나아진다 싶으면 다시 퇴원하기를 반복하는.


그러다가 두 달 후에는 아예 우리 집으로 이사를 시켰습니다.

그 이사한 집으로 한국에서 동생의 아들 가족이 다녀갔습니다.

동생은 그 집에서 처음으로 며느리의 큰절을 받고 손자를 안아보았습니다.

불과 일주일이었지만 동생은 아들이 이룬 가족들에 둘러싸여 할아버지로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또다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어느 날, 우리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동생이 묻더군요. 누나는 어떻게 미국에 올 생각을 했느냐고..

나는 40 중반의 나에게 찾아왔던 엄청난 변화를 동생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옛 이야기하듯 들려주었습니다.

이미 15년이 지난 일들이니까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동생이 그러더군요.

“나는 누나가 지금 하고 있는 일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온 줄 알았어, 누나는 똑 부러지고 야무진 사람이잖아. 누나도 나처럼 무모하게 왔네.ㅎㅎㅎ.”

동생에게 나는 흔들리는 중년이 아니라 언제나 빈틈없는 누나이었던가 봅니다.


또 동생과 나는 같은 부모와 같은 형제자매를 너무나도 다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두사람의 같은 부모님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도 다른 부모님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더없이 자상했던 아버지가 동생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분이었다 했습니다. 

외동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도, 이미 대학생, 고등학생이었던 누나들의 기대도 많이 버거웠다했습니다.


동생과 나는 같은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다른지에 대해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동생과 이전에는 가져보지 못했던 깊은 만남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를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동생의 삶에서 왜 그런 결정들을 했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이해를 넘어 동생의 그런 결정들을 질책만 했던 나의 지난 일들이 많이 미안했습니다.


동생이 마지막 호흡을 몰아 쉴 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미안하다”였습니다.

그동안 동생의 삶을 이해해 주지 못해서,

누나로서 동생이 힘들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동생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해주지 못해서,

마지막을 나에게 의지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 왜 하필 '나' 여야 하냐고 원망한 게 미안했습니다.


지금은 감사합니다.

19년 동안 같이 살았던 어릴 때보다도 더 살갑게 지난 5개월 동안 동생을 돌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낯설었던 동생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동생이 내 곁에서 전 아내와 딸과 아들과 화해하고 서로 용서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왜 하필 저입니까? “에서 “제 옆에서, 제 손을 붙잡고” 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생이 좋아했던 엄마가 끓여주던 맛의 감잣국과 된장국을 끓여 줄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어 감사합니다.


남동생은 갔습니다.

오래전에 가신 부모님과 큰언니와 다시 만나 반가워하고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며칠 전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던 분홍 봄꽃들이 어제 비바람에 많이 지고 없어졌습니다.

남은 우리의 삶도 그 꽃처럼 정해진 시간을 꽃피우고 지다가 어느 날 동생처럼 가겠지요.

동생이 가면서 나에게 준 삶은 ‘더 사랑하면서 살아야’하는 삶입니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남편도, 이제 둥지를 떠나 날아오르려는 아이들도, 내가 돌보는 어른들과 이웃들도.

여전히 전염병이 휘몰아치는 이 세상도.


* 이 년 전 남동생이 하늘나라로 간 뒤 쓴 글입니다. 오늘 산책길에서 만난 벚꽃을 보며 동생을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서랍 속에만 있던 글을 꺼내 헤어지기 전 동생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전해봅니다. *


( 2년전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꽂, 매미 피해로 말라가다가 지난 가을 죽고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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