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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Mar 12. 2022

이민자인 나도 아프다.

되살아난 불공정과 비상식이 절망스럽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미국 시간 ) 시작된 개표상황은 비록 박빙이지만 이재명 후보가 앞서고 있었다.

그렇게 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설마 반대의 경우가 생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평균적 식견과 높아진 시민의식을 믿었으니까.

애써 신경을 쓰지 않고 일상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남편으로부터 격차가 점점 좁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설마??

얼마 뒤 2번이 유력으로 떴다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하던 일손을 멈추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어쩌자고 우리 국민들은 그를 선택한 것일까?

그와 그의 무리들이 이끌어갈 한국의 앞날은 어떻게 펼쳐질까?

하루 종일 절망감에 허우적거리다 친구와 마주한 술상 앞에서 나는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내가 청춘을 받쳐 일하던 종합사회복지관은 규모별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크기에 따라 세등급으로 나뉘고 등급별로 서울시의 지원이 이루어져 기본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정부의 지원이라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장 기본만 커버하는 것이라 90여 개의 사회복지관은 원래의 목적에 맞게 사업을 펼치랴, 적자 내지 않고 운영을 해나가랴 늘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로 바듯이 살고 있는 나였지만 내 주머니 걱정은 뒷전이고 늘 복지관의 예산확보에 전전긍긍했었다.

그래도 규모별로 정부지원이 이루어질 때는 그것이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당선이 되었다.

그가 BBK 등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선택과 달리 전체 국민들의 선택이 그였다는 데에는 어쩔 도리가 없지 않나. 받아들이고 맞춰 살아야지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경쟁과 생산성으로 몰고 가는 서울시장은 규모별로 시비를 지원하던 방식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면서 도입한 사회복지관 평가제도.

서울시는 모든 복지관을 평가하겠단다. 그리고 점수별로 등수를 매기겠단다. 점수에 따른 차등지원을 위해.


조삼모사였다.

새 서울시장은 전체 예산은 그대로 둔 채 90여 개 복지관들이 경쟁하게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운영비를 차등 지원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졸지에 예산에 큰 변동이 생길 것을 걱정한 모든 복지관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더 많은 지원금을 교부받기 위해 하던 일들을 멈추고 평가에 매달렸다.

더 많은 이용자들을 숫자로 드러내기 위해, 더 효과적인 사업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기 위해 며칠 밤낮을 새워 자료를 만들었다. 서비스 대상자를 한 명이라도 더 만나고, 한 명이라도 더 병원에 데려가야 할 그 시간에 말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속 보이는 평가와 지원방식에 당황했던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집단행동을 하기로 했다. 어느 대학 강당에 모여 우리의 의견과 결의를 다지고 서울시로 간 우리는 차등 지원 철폐와 평가제도 개선을 외쳤다. 

서울시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외치는 우리를 피해 이명박 서울시장은 정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출입을 하다가 젊은 사회복지사들과 마주쳤다. 

어느 젊은 여성 사회복지사와 눈이 마주친 이명박은 집단행동을 위해 황급히 맞춰 입은 행사용 조끼를 가리키며 "그런 것 만들 돈 있으면 복지관 운영비로나 쓰라."라고 비웃었다.

신자유주의에 쩔은 서울시장에게 사회복지관은 시예산을 낭비하는 원숭이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십 년 전의 일이니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최일선에서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들과 동거 동락하던 사회복지기관들조차 무한 경쟁으로 모는 한국사회의 잔인함에 나는 서서히 내 젊은 날의 푸른 꿈을 잃어갔다.

내가 꿈꾸었던 사회는 평가 결과로 사람들과 조직을 분열시키고 경쟁하게 하기보다는 평가과정을 통해 그들을 성장시키고 연대하게 만드는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전의를 잃은 나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고 가족을 모두 데리고 다른 나라로 이사를 왔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왜 이민을 왔느냐?"라고 물으면 난 "그저, 어쩌다가.."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 새벽, 잠 깨어 뒤척이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민을 오게 된 것은 내 나라의 비상식과 불공정을 소시민인 나로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는 사실을.

아이러니한 것은 지구 반대편의 먼 곳으로 이사를 오면 내 마음도 그만큼 멀어질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아니다. 멀어진 만큼 그리움은 커지고, 커진 그리움만큼 내 조국의 빛남과 아픔에 더 민감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플지 모르겠다.

하루하루 일상에 집중하며 생각지 않으려 애를 쓴다.

오늘은 봄볕을 등에 담뿍 받으며 뒷마당 정리하는 일을 조금 도왔다.

이렇게 좌절 대신 생명을 북돋우는 일을 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까?

하지만 쉽게 극복되지도, 쉽게 잊어버려지지도 않을 것 같다.

부엉이 바위 위에서의 죽음과 세월호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은 아이들의 아픔과 슬픔이 자꾸 되살아난다.

동시에 광화문 광장의 촛불과 서초동의 촛불도 떠오른다.

그렇지, 우리는 지난 세월동안 절망뿐이 아니라 벅찬 희망도 경험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그래, 나는 촛불에 기대에 이 아픔을 이겨나가보려 한다.

내 '자아의 신화'( destiny )는, 아니 '우리 모두의 신화'는 아직 완성되지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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