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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May 14. 2021

어떻게 써야 할까... 남은 시간을

지난 일은 내려놓고 지금을 행복하게..

저녁식사를 마친 시간.

하루 일과를 끝낸 스태프들은 퇴근을 하고 거실엔 오롯이 어르신들과 우리만 남았다.

아니, 어르신들 중에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저녁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기를 원하는 어르신들만 남아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고 낮동안의 번잡함이 차분함으로 가라앉고 나면 어르신들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생각들이 있나 보다.

낮과 밤사이의 징검다리에서 피어오르는 과거와 그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그들의 '해결되지 못한 일들(unfinished businesses)'이다. 

어르신들이 그 해결되지 못한 일들에 마음을 쏟는 순간부터 그들의 마음은 평안에서 멀어져 버린다.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뒷마당을 헤집고 다니며 놀다가 날이 저물어 더 이상 뒷마당 놀이를 할 수 없는 시간이 되면 자신의 서랍에 넣어둔 수첩과 종이 뭉치를 가지고 내려온다.

그 수첩에는 아내와 딸들의 전화번호뿐만이 아니라 이전 시설의 전화번호와 한때 어울리던 친구들의 전화번호들이 두서없이 적혀있다. 

종이뭉치들은 오래전 은행 서류들과 소셜 오피스에서 보내준 편지들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한다. 

나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화를 걸기보다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먼저 시도해본다.


"내 뱅크 어카운트를 체크해봐야 해. 내 계좌에 돈이 있다고. 그것을 마누라가 어떻게 했는지 물어봐야 해."

"마누라가 자꾸 딴소리를 하니까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니야? 마누라보고 나를 데리고 은행에 가자고 말하려고."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전화를 걸어드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통화 후에는 할아버지가 더 힘든 감정상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은행계좌에는 더 이상 돈이 없다. 아니,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돈은 없다. 매달 입금되는 생계보조비만 있을 뿐이다. 그 돈은 입금되기가 무섭게 일부는 자신의 케어 비용으로, 나머지는 아내의 생계비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셈법으로는 자신의 계좌에 어느 정도의 목돈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그것을 인출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시설에 입소하기 전, 두 부부간에 그들의 남아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지 못한 듯하다. 남아있는 삶은 그만두고 그들이 같이 살면서 만들었던 오해와 갈등이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오히려 증폭되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계좌에 돈이 없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메디케이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은퇴한 할머니의 생활비로 쓰였겠지요."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한 해묵은 원망과 비난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런 대화는 할아버지를 할머니와 갈등을 빚던 오래 전의 시간으로 되돌리고 만다.




넷플릭스 'My Love ( 님아 )'라는 다큐멘터리에 첫번째 에피소드로 나오는 '데이비스와 진저 아이셤' 부부.

그들은 24살과 19살에 결혼해서 6자녀를 낳아 키운 미국 농촌의 노부부이다.

버몬트의 시골 동네에서 메이플 시럽 농장을 대대로 운영해온 가족의 10대손인 그들은 이젠 80대가 되었다.

결혼 60주년 기념을 동네잔치로 할 만큼 금슬 좋은 부부는 농장 안에 있는 집에서 산다.

아들에게 물려준 농장에서는 메이플 시럽이 만들어지고 블루베리를 재배하며 겨울이면 크리스마스트리를 키워 판다. 두 노부부는 농장이 일터인 아들의 가족들과 다른 자녀들, 그리고 이웃들과 평범하지만 안락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낸다.

메이플 시럽이 만들어지는 농장에서 가족모임을 갖고, 독립기념일을 준비하고, 친구들과 카드게임을 한다.


그렇게 더없이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들이 최근에 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최종 유언장을 작성하고, 자신들의 장례식을 미리 의논하고 준비해놓는 일이다.

두 사람은 변호사를 만나 유언장을 준비하고 이제 달라져야 하는 그들의 예산상황을 점검한다.

더 이상의 장거리 여행은 그만하기로 마음먹고, 

성장한 손주들에게 주던 용돈도 줄여나가고,

자신들이 곧 받게될 케어를 위한 장기요양보험을 확인한다.

그들의 삶이 점점 달라지는 만큼 그 삶에 들어가는 비용도 축소 조정해나간다.


그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도 너무나 담담하다.

장례가 짧고 소박하게 치러지기를 바라는 두 사람은 모두 화장을 선택한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태어나고 평생을 머문 농장의 메이플 나무숲 근처에 자신이 뿌려지기를 바란다.

이웃 마을에서 시집온 진저는 자신의 부모님이 묻힌 곳에 뿌려지고 싶어 한다. 자신의 시작이었던 그곳에.

그들은 자신들이 뿌려질 그곳을 둘러보며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서로가 바람과 함께 서로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 소망한다.




데이비드와 진저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80대가 되도록 아직 건강하고 무엇보다도 치매에 걸리지 않았다. 

데이비드의 형제들이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떴다고 하니 그도 머지않아 치매에 걸릴 가능성은 높지만 그는 그전에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게다가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해왔다.

진저는 "우리 둘은 각자의 역할분담이 분명했어요. 농장일과 여섯 아이의 양육으로 정신이 없었지요. 그런 가운데 우리 둘 만의 특별한 시간을 가졌어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행복한 부부가 되는 방법과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자연에 뿌리를 둔 일상과 성실한 삶의 태도가 그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삶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그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

두 부부 사이나 가족 간의 불신도, 갈등도, 서로에 대한 비난과 원망도...



나는 우리집 할아버지가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시간과 삶을 더 소중하게 사용하기를 바란다.

있지도 않은 돈의 행방을 찾느라, 그 돈을 없애버린 아내를 원망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데이비드와 진저처럼 자신이 미처 준비하진 못했지만 국가가 대신 마련해준 노년의 안전망 속에서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unfinished business'들을 다 내려놓고 자신과 아내를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바란다.

할아버지에게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은 그 시간들이 다 빠져나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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