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밥상은 내가 차릴 수 있어야
저녁밥 먹을 시간의 우리 집 한 장면.
노인시설인 우리 집의 특성상 우리의 저녁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노인분들에게 드리고 남은 음식이 우리 저녁인셈이다. 이제 겨우 번잡했던 부엌이 정리되어있는데 우리 부부 먹자고 새로운 반찬을 만들고 저녁을 준비하기는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다. 해서 대개는 남은 반찬을 꺼내고 밥과 국을 퍼서 먹는다.
그렇게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고 밥솥에서 밥을 푸며 나는 "저녁 먹읍시다."라고 남편을 부른다.
그러면 남편은 아무 생각 없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그저 식탁으로 걸어와 의자에 앉는다. 만약 식탁에 수저가 놓여있고 반찬이라도 한두 개 놓여있으면 젓가락으로 그것들을 집어먹으며 셀폰을 들여다본다.
미처 수저나 반찬이 놓여있지 않으면 그저 가져다주기를 기다리며 역시 전화기만 들여다본다.
내가 그럭저럭 기운이 남아있고 기분도 괜찮으면 혀만 한번 쯧 차고 넘어가지만 피곤하거나 심통이 나 있으면 예외 없이 잔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앉아있지만 말고 수저라도 좀 놓으시라고~, 같이 상 차리면 훨씬 빨리 되잖아!!"
이 잔소리를 나는 무려 37년간 해오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집 남편이 심하게 가부장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어머니 '여성'으로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이다.
그러면 부엌일을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건 다 할 줄 안다. 간단한 음식부터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구이는 프라이팬 구이든, 그릴 구이든 마음먹은 대로 해낸다.
설거지?, 그는 우리 집 최고의 설거지 고수다.
그런 남편이지만 도무지 자기가 먹을 저녁밥상에 수저 놓을줄도 모르고, 반찬통 꺼내놓을줄도 모른다.
왜 그럴까?
며칠 전 입소후 불과 나흘 만에 집으로 돌아간 할아버지 한분이 계셨다.
80대가 되도록 두 부부가 도란도란 잘 지내다가 어느 순간 부인이 쓰러졌다. 당뇨관리가 잘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점점 잃어가는 입맛으로 자신의 끼니는 거르면서도 남편의 밥상을 차렸다. 그러다 저혈당 쇼크로 쓰러졌고 병원을 거쳐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다. 중환자실까지 들어갔던 할머니는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자 "할아버지 밥을 챙겨줘야 하는데...혼자서는 밥도 못찾아먹을텐데..."를 입에 달고 계셨다.
할아버지 역시 수시로 전화해서 집에 먹을 것이 없다고 회복 중인 할머니에게 투정인지 푸념인지를 해댔다.
할아버지는 버튼만 누르면 되는 밥솥 사용을 못하는걸까?
쌀을 씻고 물을 맞추어 밥솥에 넣는 것을 해본 적이 없으신걸까?
아니면, 자기 먹을 것을 장만하고 준비한다는 코드가 아예 없는 것일까?
집으로 음식을 실어 나르던 자녀들은 할아버지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할머니가 있는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하지만 '제때 제공되는 식사'보다도 '독립적 일상'의 욕구가 더 컸던 할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와 함께 지낸 나흘 동안 할머니가 더 이상 자신의 식사를 제공해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만 확인한 채.
앞으로 할아버지는 자녀들이 규칙적으로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스스로를 돌보며 살아야 한다.
할아버지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럴 가능성은 그리 크지않다.
왜냐고? 할아버지는 사는동안 할머니 없이 혼자 생존할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0대에 접어드는 은사님이 계신다.
평생 동안 치의학, 신학, 사회사업학 학위 공부만 하느라, 그 학위로 일만 하느라 혼자 사셨다.
한 번씩 방문해 들여다본 은사님의 집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고 냉장고는 적당히 음식이 채워져 있었다.
늘 바쁜 중에도 음식을 손수 해 먹으신다는 소리였다.
은사님이 제일 좋아하는 선물은 다름 아닌 잘 익은 김치. 워킹맘인 우리들이 잘 익은 김치 하나면 저녁 식탁 풍성하게 차려낼 수 있는 것처럼 은사님도 김치 하나로 맛있는 일품요리를 만들었다.
바로 자신을 위해서.
언젠가 들여다본 냉장고의 냉동실에는 밥이 사기 밥공기에 담겨 얼려져 있었다. 무려 십여 개나.
은사님은 갓 지은 밥을 밥공기에 담아 냉동시키면 언제든지 전자레인지로 새 밥처럼 만들수있다는 엄청난 살림의 노하우를 알고 계셨다.
그렇게 은사님은 평생 혼자 살면서 스스로 생존훈련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은사님은 체육관에서의 운동과 식사 준비, 독서와 저술, 그리고 외부 강연과 제자들과의 만남으로 매일매일의 노년을 풍성하게 즐기고 계신다.
우리 집 남편이 밥상 차리는 것에 솔선하지 못하는 것이나 할아버지가 병든 할머니에게 여전히 자신의 생존을 의존하려고 하는 것이나 모두 경직된 역할분담 속에 스스로 생존할 훈련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않을까?
가끔씩 그릴로 돼지고기 삼겹살과 닭다리를 노릇노릇 구워 식탁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새털같이 많은 매일의 평범한 밥상을 차려낼수있는 능력이 노년의 생존에 더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또한 언젠가는 부부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쓰러진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때가 닥쳤을 때 두 사람 모두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기본 생활기술을 익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생존훈련에는 부부 두 사람의 이해와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
내가 밥상 차리기는 내 고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공유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남편은 절대 배울 수가 없다.
내가 가끔씩 먼지 쌓인 그릴을 꺼내 닦고 온도 맞추어 고기 굽는 법을 알아야 되는 것처럼 남편도 김치는 어디에 있고, 밥은 어떻게 하며, 남은 반찬은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훨씬 불리하다.
일찌감치 생존훈련에 노출되고 숙달된 여자들이 할머니가 되어 할아버지들보다 십 년 이상씩 오래 사는 것도 우연은 아닌것같다.
요즈음의 젊은 세대들처럼 유연한 성역할을 보고 배우지 못했던 중년 이후의 남성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앞치마를 두르고 아내 옆으로 가시라.
그리고 아내가 하는 일을 배우고 익히시라.
그러면 현재의 삶도, 미래의 삶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당신앞에 펼쳐질것이다.
밥 준비를 같이 하는 멋진 남편과 아빠라는 가족의 칭송이,
아내 없는 노년에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기술이 선물처럼 당신에게 전해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