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대신 희망을, 분노 대신 평화를
"똑똑똑.."
"혹시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없나요?"
저녁 8시쯤 하루 일정이 끝난 나는 두 분이 들어간 방문을 두드렸다.
오늘이 입소 첫날이니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했을 것이다. 낮에 가족이 정리해놓은 서랍장에서 갈아입을 속옷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뭐가 어디에 들어있는지 알 수 없어 투덜거리고 있던 할아버지는 방문을 두드리는 낯선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이 끝났으면 그만이지 왜 자꾸 문을 두드리고 그래??!"
"허걱.."
두 분이 사용하는 방의 맞은편 방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문을 빠꼼이 열고 두리번거리던 할머니가 시선이 마주친 우리에게 할아버지 옷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달란다.
두 분의 모든 것이 그분들 방에 있는데 할아버지 옷을 우리에게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차례 버럭 소리를 들은 터라 함부로 할머니를 따라 그들의 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레지던트가 도움을 청하는데 또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수없이 나와 남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 구석에 있던 할아버지가 우리를 보고는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함부로 남의 방에 들어오고 그래, 엉?!"
"헉, 허거걱.."
상쾌한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시간.
방마다 들여다보며 밤새 별일이 없는지 살펴보던 남편은 할아버지가 세면대에 엎드려 세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남편은 할아버지의 귀가 어두운 것을 감안하고는 가까이 다가가 할아버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아침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 잘 주무셨어?"
가까이에서 어깨까지 두드리며 인사하는 남편에게 할아버지는 물 묻은 얼굴을 들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반말은 하고 그래?!"
"엥????..."
두 분의 불행은 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급격하게 신장이 나빠진 할아버지는 끝내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투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신장투석과 단백질 알레르기로 음식조차 함부로 먹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삶에는 한 줌의 즐거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할머니는 치매 중기를 넘어서고 있었다. 할아버지 옆에서 계속되는 할머니의 맥락 없는 질문과 대화는 할아버지를 더 절망에 빠뜨렸다.
두 사람의 시설 입소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년 전 근처의 다른 시설에 입소했다가 6개월 만에 적응치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코로나 상황 속에 자녀와 함께 살던 두 사람은 그들을 돌보느라 소진된 자녀의 손에 이끌려 다시 우리 집으로 온 것이다.
자녀들은 두 사람이 시설입소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 우리 집은 노인시설이 아니라 그저 방과 음식을 제공해주는 하숙집이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우리는 함부로 방에 들어오는 무례한 사람이고 반말이나 하는 막돼먹은 사람들일 수밖에.
아니 어쩌면 우리 같은 사람과 시설들이 있어서 이곳으로 보내진 것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어제는 처음으로 아침인사를 건넸다.
복도에서 마주치며 어쩔 수 없이 건넨 인사지만 그동안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분의 입에서 나온 "굿모닝"은 그 어떤 아침인사보다도 반가웠다. 드디어 할아버지가 새끼손톱만큼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이민가정의 가장이었다.
한국에서는 나름 잘 나가는 직장인이었지만 미국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들을 해나가다가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자리를 잡았고 자녀들을 키웠다. 자녀들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전문 직업인이 되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산 집은 백만 불이 넘는 자산이 되었고 세탁소도 잘 꾸려나갔다. 성공적 이민의 삶이 이루어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오랜 세탁소일은 할아버지에게 케미컬 중독의 후유증을 남겼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신장 질환이 어느 순간 할아버지의 삶을 점점 허물어뜨렸다. 설상가상 할아버지의 콩팥처럼 할머니의 뇌도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노년의 삶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치달았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잘되던 세탁소도, 백만 불짜리 집도 투병 5년여 만에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같이 무너져내리는 치매 아내와, 투석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몸과, 분노와 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 남은 시간뿐이었다.
어쩌면 그런 할아버지가 세상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완서 에세이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20대의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하늘을 원망하는 작가에게 어린 수련 수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으로 절망에 빠졌던 작가는 수녀님의 이 한마디에 사고의 전환이 생겼고 삶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생명을 가진 우리 모두는 노화와 죽음이라는 과업을 앞에 두고 있다.
생명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의 노화와 죽음일 것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빨리, 때로는 너무나 가슴 아픈 모습으로, 또는 모두가 소망하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문제는 대부분의 우리들이 그런 엄연한 진실 앞에서 자신은 벗어나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단말인가? 왜 하필 나에게..."라고.
"선량하고 착실하게 살아온 만큼 시듦도 받아들일만하게 그렇게 천천히 다가오지 않는단말인가?"
"왜 신장이 망가지고 뇌가 망가지는 힘든 말년의 삶이 나에게 찾아온것일까?"
"왜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다섯 가지의 혈압약을 드시는 할아버지의 혈압이 입원을 해야 할 만큼 오르내리자 우리는 무염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주치의는 마지못해 한 가지 약의 용량을 두배로 올렸다. 그러자 혈압이 조금 내려갔다. 여전히 높은 숫치이긴 하지만 당장 응급실 신세를 져야 할 정도는 아니라 조금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다시 정상식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방문하기로 되어있는 가족에게 전화해서 외식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집에서 먹는 정상식도 아닌 소금이 잔뜩 들어간 식당의 음식 말이다.
할아버지는 지금 밥 한 그릇의 선택이 내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내일의 자신을 절망에 빠뜨리는 선택을 계속하려고 한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지금의 자신은, 과거 자신의 선택 결과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자신에게 찾아온 병고와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운 일일까?
여전히 분노와 의심, 우울과 절망으로 그늘진 얼굴이지만 아침 인사를 건네는 할아버지에게서 나는 희망을 찾고 싶다.
할아버지도 박완서 님이 경험했던 사고의 전환을 통해 노년의 불행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햇살 좋은 오후에는 할머니와 함께 뒷마당으로 더 자주 산책 나올 수 있게되기를,
뒷마당을 몇 바퀴 돈 뒤 바람 부는 포도나무 밑 벤치에 앉아 아내와 함께 '아, 목동아' 노래를 더 자주, 더 오래 부르실 수 있기를 희망한다.
불안과 혼란으로 두려워하는 치매 아내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를 더 오래 들려줄 수 있기를, 아니 할머니 옆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