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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Nov 18. 2022

미국에서 딸 결혼식

내 결혼식과는 너무 많이 달랐던 딸의 결혼식

"엄마, 우리 결혼식에 110명만 초대하기로 했어요. 엄마 아빠 친구분들과 친척들 몇 분 초대하실 생각인지 알려주세요."


'작은 결혼식'을 하기로 한 딸과 사위는 결혼식 초대 인원을 110명으로 결정을 하고 그렇게 예약을 했단다.

이를테면 결혼식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110명을 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 인원 제한 내에서 신랑 신부 그리고 양쪽 부모는 각각 누구를 초대할 것인지를 심사숙고해야 했다.


잔치, 그것도 선남선녀의 결혼식에 축하손님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던가? 적어도 부모인 우리 결혼 때만 해도 그랬다. 몇백 장 단위로 청첩장을 찍고 신랑 신부의 친구, 직장동료보다도 양쪽 집안의 친척들이나 부모님들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청첩장이 뿌려지고는 했었다. 심지어 청첩장을 받지 못한 지인들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참석해 축하해주고 같이 음식을 나누기도 했었다.

내 젊은 날의 결혼식은 신랑 신부의 결혼식이기에 앞서 양쪽 집안의 결혼행사였다.


하지만 불과 한 세대가 지난, 그리고 미국에서 치룬 내 딸의  결혼식 양상은 달라도 너무 달라져버렸다. 

결혼식의 주체도 신랑 신부, 피로연의 주체도 당연히 부모가 아닌 그들, 신랑 신부였다.

그 둘은 자신들의 결혼식 플랜을 짜고 초대 인원을 정하고 부모인 우리들에게 초대할 사람들의 규모를 정해주었다. 결혼식의 계획부터 들어가는 돈까지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하고 있던 아이들의 의견이니 우리가 감내라 배내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청첩도 시당숙 이름으로 하고 시부모의 주도로 진행되었던 내 결혼식과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정작 자식 결혼식에서 부모인 우리의 역할이 별로 없다는 것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실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우리 부모들의 개입을 단호히 거부한 데에는 약간의 이유가 있었다.

평범한 우리 집과는 달리 사위의 집은 자식의 결혼을 앞두고 조금 복잡한 가족 내 다이내믹이 있었다.

우선 사위의 어머니가 세 자녀 중 막내인 사위가 결혼을 한다는데 약간 부적응하고 있었다.

아직 막내아들을 품에서 독립시킬 준비가 안되어있다고나 할까?

그렇다 보니 결혼비용도 도와주고 싶고, 또 그만큼 결혼식에 엄마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했다.


"손님을 30명 이내로 초대하라고?, 그게 말이나 되냐?, 네 사촌들만 해도 몇 명인데?"

"서부에서 온 친척들이 묵을 수 있게 호텔 예약을 했어야지!!"

8남매의 막내딸이었다는 사위 엄마는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조카들만 참석을 해도 그 인원이 넘는다며 화를 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로 본국 대만에 있는 친척들은 참석을 못하고 주로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친척들만이 참석해서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더구나 딸과 사위는 '아이들 없는 결혼식'으로 결혼식 참석에 또 다른 제한을 두었다.

한창 결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결혼식에 여러 번 참석한 경험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부모품에 안겨있는 아이들이 아닌 제 발로 걷고 뛰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파티'에는 적합하지 않다나 뭐라나..

아닌 게 아니라 예식 후의 피로연 테이블에는 의자마다 초대된 사람들의 이름 카드가 놓여있으니 아이들이 앉을자리가 마땅치않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 출입금지'라는 방침은 양쪽 부모 모두에게 불편함을 주었다.

사위 엄마는 나이 든 조카들이 거의 그 연령대의 자녀들이 있어서 "사촌 형들이 참석하지 말라는 소리냐!"라고 화를 냈고 우리 역시도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쏟아냈었다.

그러나 딸과 사위의 결정은 단호했다.

하는 수 없었다. 이 역시도 '혼주'인 그들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이런 갈등 상황에서 사위는 보다 분명하게 "이 결혼은 자신들의 결혼식"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양쪽 부모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우리들에게 통보했다. 쉽게 말해 자신들의 결혼식은 자신들의 뜻대로 하겠으니 부모님 당신들도 그저 초대손님으로 참석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리 일터였다.


나는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의 역할이 너무 사라진 것에 당황하고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다행히 아이들이 한국식 폐백을 하겠다고 해서 밤과 대추를 준비해 폐백상을 준비해주고, 아이들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참석자 답례선물로 한국식 떡을 준비해주는 등 내가 할 일을 찾아 하면서 그 섭섭한 마음을 조금 달랬다.

하지만 사위의 엄마는 결혼식 며칠 전까지도 사위에게 말도 하지 않을정도로 냉랭해 했단다. 그때의 그 난감한 상황이라니...


사실 미국에서의 결혼은 대부분 신랑 신부 당사자들이 주도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준비하고 진행하는 결혼식에 '가장 중요한 초대손님'일뿐이다. 딸 결혼식을 앞두고 이리저리 알아본 바로도 대부분 그랬다. 다만 부모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적당한 액수의 돈을 지원함으로써 부모의 할 바를 대신했는데 그 금액도 1만 불에서 3만 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분명 친한 친구인데도 자녀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때면 그들은 거의 같은 말을 했다. "미안해, 스몰 웨딩이라 내 친구들은 거의 초대 못했어."라고.

딸 결혼식을 치러본 나도 이제는 안다. 내 딸 결혼식이라고 내 맘대로 내 친구들 모두 초대할 수 있는 그런 문화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37년 전 충무로 '한국의 집'의 멍석 깔린 마당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시부모님의 친구들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 속에서 결혼식을 치렀던 나는, 딸의 결혼식이 많이 낯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성인으로서 자신들의 결혼을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진행했다는데 부모로서 섭섭함보다는 대견함과 고마움이 더 크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지원 없이 자신들이 준비한 예산안에서 치러냈다는데 부모로서 이렇게 고마울 수가!!!

(기둥뿌리 휘청하도록 그동안 모아둔 노후자금까지 다 털어내 딸 시집보낸 친구한테는 염장 지르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 부디 친구가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생화 대신 모든 꽃을 조화로 준비하고, 테이블 장식을 아마존으로 주문해 직접 준비하고, 신랑 신부 첫 댄스를 위해 일주일간 클래스를 다니고 동분서주하면서 준비했던 아이들.

그런 중에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챙겨주는 우리들의 도움을 기꺼이 받고 감사해하던 아이들.

저희들 준비한 대로 소박하지만 아름다웠던 예식과 짜임새 있고 재미있었던 결혼파티.

이 모든 것이 감사하게도 순조로웠다.


그러면 된 거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크고 작은 어려움이 없을까.

아이들은 자신들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또 그만큼 자랐다.


딸이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전화해서 내게 물었다.

"결혼식 어땠어요?, 뭐 불편한 것은 없었어요?"

결혼식의 주인으로서 아이들은 와주었던 초대손님들에게 불편한 것은 없었는지 끝까지 챙기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 결혼식의 주인은 오롯이 딸과 사위였다.

그리고 딸을 결혼시켜 완전히 독립시킨 나는 지금 많이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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