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장 빛나던 순간의 나를 기억하고싶어 한다.
할아버지는 이북 출신이었다.
신의주 어디쯤이 그의 고향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 계셨으면 100살이 다 되셨을 테니 1920년대쯤이었으리라.
일찍 고향을 떠나와 만주로 떠돌던 할아버지는 철도 역무원이 되는 행운을 잡았다.
20대의 그는 만주 철도에 올라타 드넓은 만주를 누비는 젊음을 누렸다.
"그 넓은 만주 벌판을 달렸지... 몇 날 며칠이고 달렸어... 식사로 카레를 자주 먹었지..."
할아버지의 그 특별한 경험은 그의 평생을 두고 오래오래 기억되는 기쁨의 원천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처음 우리 집에 입주하면서부터 듣게 된 그 이야기는 새로운 말동무가 생길 때마다, 티 비에 기차가 나올 때마다, 그때 기차에서 자주 먹었던 카레라이스가 식탁에 오를 때마다, 아니면 너무 무료해 그의 기억이 과거로 흐를 때마다 특유의 감탄사와 함께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명문 여고 출신이었다.
97살의 할머니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고 특히 할머니의 외갓집은 남녀를 불문하고 고등교육을 시켰던 터라 할머니는 시골집을 떠나 서울 명문 여고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게다가 할머니는 그때로서는 드문 테니스 선수여서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으로 여고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백 살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할머니의 손가락엔 그 학교 문장이 새겨진 금반지가 끼워져 있다.
미국에 오기 전 여고 동창생들이 맞추어 준 것이라 했다.
그 할머니가 노년의 마지막에 다시 기숙사 생활을(?) 하고 계신다.
삼시 세끼 식사가 제공되고, 본인만의 독방이 제공되는 노인 요양시설이 할머니에겐 여고시절의 기숙사와 다를 바 없나 보다.
침대에 누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 끝에 할머니는 80여 년 전의 여고생으로 돌아간다.
"기숙사에서 나오는 음식은 남기면 안 돼요( 남김없이 식사를 마친 뒤. )…"
"기숙사에서 하도 먹어서 난 이 반찬은 좋아하지 않아요( 두부, 콩나물 반찬을 남긴 뒤. ).."
"기숙사 방이 조용해서 참 좋아요 ( 복도 끝 할머니방에 만족하며. )…"
"학교 때 테니스를 쳐서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해요.( 누군가가 건강은 어떤지 물으면 언제든. )"
할머니는 지금 현재의 삶과 여고시절의 삶을 넘나들며 일상을 살아낼 힘을 얻는듯하다.
난 가끔 이분들의 다른 연령대 삶은 왜 잘 기억되지 않는지 (또는 표현되지 않는지) 궁금하다.
두 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치열했던 장년의 삶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할아버지가 이북에 두고 온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은 어디에 묶여있는 걸까?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와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면서 겪었던 어려움들과 기쁨들은?
할머니는 자신이 손주를 키웠다는 사실을 왜 잊어버리신 걸까?
가족과 함께, 또는 홀로 감당했던 낯선 미국에서의 4-50여 년간 삶들은 어디에 간 것일까?
외롭고 고단한 이방인의 삶은 단단히 봉인시켜 버린 것일까?
아니면, 기억되지 않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키로는 오랜 세월 동안 바래고, 흐릿 해지는 모든 기억들 중에서도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청춘의 기억들 만이 유독 오래오래 되새김질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만주 벌판을 횡단하며 맞았던 석양과 일출의 벅참이,
기차 안에서 동료들과 먹던, 왕성한 식욕을 자극하던 카레의 강한 향기가,
용솟음치는 젊은 근육으로 라켓을 휘두르고 공을 넘기던 짜릿함이,
땀을 흘린 뒤 마주했던 나만의 고요한 공간이,
오래오래 기억되고 미소 짓게 하는 듯하다.
그렇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내가 바로 나인 것이다.
그 기억이 나를 나답게 살도록 이끌었고, 죽음을 마주한 지금도 바로 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