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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Jan 05. 2021

19살 외로운 청춘을 울렸던 만두

집에서 빚은 만두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너.

"이번 겨울에 김장을 얼마나 하셨어요?" 머리를 잘라주며 미용실 원장님이 물으신다.

자기는 네 박스나 했단다. "네 박스? 아니 두 부부 사시는데 무슨 김치를 그렇게 많이 담아요?"

그 많은 김치를 가지고 겨우내내 만두를 만들어 먹는단다. 

아, 그렇다면 네 박스로도 모자랄 수 있겠다.

식구가 많은 우리집도 적지않은 양을 담근다. 그리고 그것으로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 넣은 김치찌개, 햄 넣은 김치볶음밥, 해물 얹은 김치전을 종종 해먹는다. 하지만 잘익은 김치 썰어 넣은 만두는 잘 해먹지않는다.

많은 식구들 먹일 양을 만들려면 일이 많고 번거로워서 그런것일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런것만은 아닌것같다.


내 인생에서 만두빚기는 십대까지로 국한된다. 

엄마가 겨울이면 만두를 빚고 강정을 만들고하시던 그때까지만으로.

내가 집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할 즈음부터  엄마는 만두빚기를 그만두셨다.

경제적 어려움은 엄마에게서 만두를 빚는것같은 평화로운 일상을 앗아가버렸다.

그렇게 만두빚는 일상이 내 삶에서 사라지고나서 '집에서 빚은 만두'는 남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던 '빚은 만두'를 나는 가장 외롭고 추웠던 19살 어느날 다시 만났다.

까만 비닐봉지에 담겨 문고리에 꽁꽁얼어 매달린채.




친구는 대학 1학년 신입생일 때 만났다.

팔랑거리지 않고 묵직한 성품의 친구를 만났을 때 나는 이상하게 어디서 본듯한 모습에 조금 의아했었다.

그녀는 부산 출신인 나하고는 만날 일이 없는 서울 출신이었으니까.

그래도 이상하게 친근하고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기간 중에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물어보았다. 혹시 나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리는 서로의 짧은 인생 경로를 나누었고 결국 우리는 같은 중학교에서 한 해 동안 한 반이었음을 알아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 몇 년 살았었던 친구는 중1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었다가 중3학년 때 다시 서울로 전학을 갔다 했다.

일 년 동안 같은 반이었어도 친구와 나는 일 년 동안 몇 마디 나눈 적도 없는 무늬만 같은 반이었던 거다.


부산 출신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에 비해 그 친구는 같은 고등학교출신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정점을 찍은 우리 집 몰락의 한가운데에서 나 홀로 대학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고 그 친구는 형제 많은 다복한 가족과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과가 정해지기 전 문리과대학의 1학년생으로 같이 어울려 다녔다.

친구의 소탈하고 묵직한 성품과 말없이 고난 행군하던 나의 성격이 맞았다고나 할까.


1학년이 끝난 겨울방학이었다.

새해 첫날이었지 아마.

밤새 내린 눈은 온천지를 하얗게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새해 첫날의 눈은 거리를 더 한산하게 만들어놓았다.

많은 눈이 내린 서울의 한구석에서 마음 둘 곳 없었던 19살 나는 좁은 자취방에서 청승맞게 새해 첫날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외투를 걸쳐 입고 무조건 집을 나섰다. 그리고 나의 작은 세상이던 학교로 갔다.

학교 안은 발자국 없이 하얀 눈벌판이 펼쳐져있었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며 만들어내는 내 발자국만이 외롭게 그 흔적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방학이 되었어도 부산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방학이라고 내려가면 더 이상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내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마침 나에겐 막 시작한 연구소 조교일이 있었다.

사실 대학원 조교의 보조였지만 용돈 정도는 받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연구소라는 '소속'이 내게는 필요했다.

그렇게 집에 내려가지 않은 나는 거의 매일 학교로 갔다. 대학원 선배가 주는 자료 정리 일거리를 하기도 하고 과제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그곳은 나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눈 내린 새해 첫날의 하루를 보냈다. 아무도 없는 학교의 썰렁한 한 연구소에서.


겨울의 하루는 빨리 지나간다.

외로움을 곱씹으며 밀린 신문 스크랩을 하고 설문조사지를 분류하고 그리고 멍하게 그냥 앉아있었다.

그렇게 네댓 시간을 보낸 뒤 나는 다시 주섬주섬 챙겨서 아무도 없는 썰렁한 건물을 나왔다.

그곳에 혼자 앉아있는 내가 너무 측은했다. 

그래, 그냥 집으로 가자, 가서 뭐라도 챙겨 먹자.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문득 부산 집의 식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엄마와 언니들이 보고 싶어졌다. 함께 먹던 새해 아침 떡국이 생각났다.


그렇게 나는 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자취집으로 돌아왔다.

낡은 일반주택의 파란 쇠 대문을 지나 옆 모서리를 돌면 있던 나의 공간.

알루미늄 문을 열면 현관 겸 부엌이 있고 댓돌을 짚고 올라서면 있던 작은 방.

고개를 떨구고 들어선 내 눈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엇?? 알루미늄 문고리에 알 수 없는 검은 비닐봉지가 하나 달랑달랑 걸려있었다.

무엇일까?

내가 사는 이곳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누가 걸어놓은것일까? 

차가운 날씨에 곱은 손으로 봉지를 풀어보니 안에 들어있던 꽁꽁얼은 열댓 개의 빚은 만두.

그리고 "00가 왔다 간다"라고 친구가 써놓은 종이쪽지.


나는 그 봉지를 들고서 그만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만두는 그 친구가 놓고 간 것이었다. 

친구는 새해 첫날 떡만둣국을 먹으며 집에 내려가지않은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식구들의 눈치를 봐가며 얼른 만두 몇 개를 훔치듯이 봉지에 넣어 버스를 타고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셀폰도 없고, 주인집 전화도 여의치 않던 시절에 설마 새해 첫날엔 집에 있으려니 생각했을 것이다.

"얘가 새해 첫날 어디를 갔을까?"의아해하면서 알루미늄 문고리에 봉지를 매달아놓고 뒤돌아섰을 것이다.


나는 친구의 그 마음이 서럽도록 고마워서 울었다.

홀로있을 나를 생각하고 찾아와준 친구가 있다는게 고마워서 울었다.

새해 첫날, 서울 한구석의 외도톨이였던게 새삼스럽게 서러워서 울었다.

보고 싶은 가족들 곁이 그리워서 컥컥 울었다.


그렇게 한바탕 눈물바람을 한 뒤 내가 그 만두를 먹었는지, 맛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과 함께 먹었을 음식에서 무슨 맛을 느꼈겠는가.

하지만 검정 비닐봉지속의 빚은 만두는 그날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수북수북 쌓였던 눈과 추위, 파란 쇠 대문과 낡은 알루미늄 문, 그리고 검정 비닐봉지 속 만두.

그리고 그 친구와의 기억은 겨울이면 '집에서 빚은 만두'속에  담겨 늘 나에게 찾아오곤 한다.

그 만두의 맛은 19살 청춘의 외로움과 서러움이 뒤섞인 슬픈 맛이다.


깊어가는 겨울이다.

새해를 시작하며 떠오르는 인연들에 대한 그리움이 문득 슴을 적신다.

대학 졸업 후 각각 다른 도시에서 살면서 더 이상 만남을 이어가진 못했지만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빚은 만두를 볼 때마다 수면 위로 올라오곤한다. 나의 젊은 날의 외로움과 친구의 따뜻한 위로과 함께.


"00야, 잘 지내고 있는 거지? 40년이 지나가고 있구나. 내가 빚어 대접하긴 어려워도 언젠가 맛깔스럽게 빚어 끓여내는 만둣국 집에 같이 가자꾸나. 가서 같이 한그릇씩 먹자꾸나. 그날 네가 놓고 간 만두가 외로운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를 이야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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