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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Jul 28. 2021

2. 바람이 시원했던 날

[9288km] 블라디보스토크, 2018년 7월 27일

여행 중에는, 특히 첫날은 긴 이동과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긴장감, 첫날부터 신기한 곳을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 등으로 피곤에 절어 일기 같은 건 내버려 두고 씻자마자 곤히 엎드려 잠들고 싶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여행 중에라도 하루를 충실하게 기록하고 싶은 욕심 반 의무감 반으로, 한 시간 가까이 누워 잠이 들락 말락 미적거리다 겨우 호스텔 침대에 쭈그려 앉아 펜을 들었다.


부족하게 자고 새벽부터 움직여서 그런지 비행기 안에서는 내내 잠들어 있었다. 짧은 비행 끝에 도착한 러시아는 글쎄, 기대한 만큼 새로워 보이지 않는 곳이랄까. 블라디보스토크는 마치 90년대의 부산 같아 보이기도 해서 익숙한 느낌이었다.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과, 한국에서 수출된 시내버스들 때문이었을지도.

워낙 무더웠던 한국의 요즘 날씨 때문에, 바람이 시원한 게 낯설고도 반가웠다. 기차역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종점 기념비에서 과거의 기관차를 살펴보고, 바로 옆에서 출발할 준비를 하는 요즘 횡단 열차를 구경했다. 창문 안으로 살짝 보이는 3등실은 생각보다 더 낡고 어두침침해 보였지만, 그런 걸 경험하러 가는 거니까. 생각보다 무더워 빨래 거리가 너무 빨리 늘어나는 게 조금 걱정되었다. 돈이야 얼마 안 하더라도, 셀프서비스로 빨래 빨고 있는 시간이 아깝긴 하니까.


하긴, 그 시간 조차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아르바트 거리에는 '버거킹'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해변공원의 행사장에서는 소규모 밴드가 '마이클 잭슨'의 <Smooth Criminal>을 편곡한 곡을 부르고 있고, 극장에서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최신작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구 소련의 잔재라는, 경험해보지 못한 문화를 기대하고 국경을 넘어온 여행자에게는 조금 섭섭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화는 서로를 물들이나 보다.


밤 9시 가까이 되어도 해가 떠있었다. 그래서인지 숙소의 여행객들은 11시가 넘어서도 많이들 깨어 있다. 까레이스키(한국인) 숙박객이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보던 러시아 청년과 눈이 마주쳐 꾸벅 서로 인사했다. 숙소에서도 한국인 여행객이 은근히 많이 보인다.


샤워룸에 샴푸가 없다. 그간 다녔던 여행지의 호스텔에는 보통 있었던지라,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 물비누도 없는 샤워 부스가 많아 급한 대로 세면대 물비누를 잠시 빌려 썼다. 내일은 마트에 가서 물비누를 하나 사야겠다.


새삼 깨닫지만,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남에게도 당연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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