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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Jul 29. 2021

5. 횡단 열차에서의 첫날

[9288km] 시베리아 횡단 열차, 2018년 7월 30일

미묘하게 몸보다 작은 침대 때문인지,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어 이른 아침을 맞았다.


몸을 곧게 펴지 않고도 어디서나 잠들 수 있을 만큼 둔한 신경이 부럽다. 맞은편 2층의 러시아 여자분은 G라는 이름의, 약간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소녀다. 말이 많지는 않지만 웃는 얼굴이 순박해 보인다. 하바롭스크까지 간다고 하니 오늘 저녁쯤 내릴 것 같다.


맞은편 할머니께서 아침 식사로 방울토마토와 치즈를 나눠주셨다. 나도 답례로 뭔가 나눠드리려고 했지만 이미 식사를 다 하셨나 보다. 창밖의 풍경은 아직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과는 거리가 있는, 모르고 봤다면 한국이라 착각할 만한 익숙한 수풀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 호기심에 보드카 맛 사탕을 샀는데, 초코 비스킷 안에 진짜 보드카가 가득 들었다. 잠 오지 않을 때 먹으면 되겠다. 차가 꽤 격하게 흔들릴 때도 있어서 오래 글을 쓰다가는 멀미를 할지도 모르겠다.

G가 하바롭스크에서 굿 럭이란 말을 남기고 내리고, 또 다른 러시아 여자분과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2층 침대에서 곯아떨어진 러시아 아저씨가 탔다. 러시아 사람들은, 특히 할머니랑 서로 할 말이 많나 보다.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인 게 분명해 보이는, 맞은편에 계신 할머니와 새로 탄 여자분은 끊임없이 즐거운 수다를 이어갔다. 온 사방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한 명쯤은 다른 나라에서 나처럼 여행 온, 영어나 일본어나 한국어가 통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침 식사 이후에도 맞은 편의 할머니께서는 가끔씩 먹을 것을 주신다. 어느 나라나 할머니 인심은 비슷한가 보다. 선잠 때문에 피곤한 몸을 깨우려고 넷플릭스 앱으로 미리 저장해둔 슈퍼카 다큐를 봤다. 다 볼 때쯤 창밖을 보니 오전과는 조금 다른, 광활함이 슬슬 묻어 나오는 풍경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쓰려고 마음먹었던 글을 조금 써 내려가다가, 창밖의 풍경과 주변 러시아 승객들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뭔가 즐거워 보이는 대화에 묻혀 잠시 고민하다 글을 그만 쓰고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결정한 오후. 그새 또 실체가 없는 뭔가에 쫓겨서, 현재를 충실하게 즐겨야 할 곳에서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또한, 아마도 다시 오기 힘들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데.


떠나기 전까지, 시베리아의 풍경과 열차 안의 심심하면서도 따뜻한 모습을 좀 더 눈에 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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