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천 Jul 30. 2021

6. 초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9288km] 시베리아 횡단 열차, 2018년 7월 31일

하루 사이에 새 꽤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어제 생각보다 피곤했던 건지.


아침에 잠깐 뒤척인 거 빼고는 맞춰놓은 자명종이 울릴 때까지 깨지도 않고 잘도 잤다. 어젯밤 정차한 역 앞에서 사 온 빵과, 하나 남았던 감자 분말 컵(러시아어를 읽을 수가 없어 이름을 모르겠다)으로 아침을 때우고, 느긋하게 넷플릭스에서 평소에 보고 싶었던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한 편을 보며 오전을 보냈다.

맞은편 할머니께 자꾸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 죄송스러워, 길게 정차한 어느 역 앞에서 작은 체리 열매 같은 과일을 100 루블 주고 사 와서 같이 먹자고 말씀드렸다. 할머니께서 환히 웃으시며 무슨 말씀을 하시며 손자에게 덜어주셨다. "이거 사려고 일부러 내려갔다 온 거니?" 아니면 "우리 손자 좋아하는 건데 어떻게 알고?" 같은 내용이 아니었을까?


그 뒤로 조금은 더 친숙해져, 러시아 티백도 조금 얻어먹었다. 조금 보답했더니 이전보다 더 받는다. 할머니와 손자는 사이가 참 좋아 보인다. 끼니 챙겨주실 때는 아이의 엄마 같고, 농담하며 장난칠 때는 친구 같다. 평생 아이의 가장 행복한 추억이 되겠지.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손자와 즐거운 기억을 많이 만드셨으면 한다.

이르쿠츠크까지 절반 넘게 온 곳에서 잠시 긴 정차가 있었다. 허름하지만 평화로운 역사, 바람 쐬러 나온 여행객들과 승무원들, 붐비기 시작한 매점, 예쁘게 물든 석양. 그리고 석양 앞에 자리 잡은, 드디어 광활한 면모를 드러내는 시베리아의 초원. 횡단 열차를 탄 후 아마도 처음으로, 정말 먼 곳까지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집에서 굉장히 먼 곳까지 떠나왔다. 내일 밤에는 드디어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내리기 전 한동안 바이칼 호가 오른쪽으로 보일 테니, 그 풍경도 충실히 눈에 담아 가야겠다.


잘 시간이 되어 객차 안의 모든 불은 꺼진 지 30분쯤 되었다. 어두운 미등에 의지해 일기를 쓴다. 할머니의 손자와 복도 2층의 여자아이는 그새 단짝 친구가 되었는지 아직 잘 생각도 하지 않고 신나게 뭔가 떠들고 있다. 대부분은 잠을 청하고 있고, 나도 곧 잠들 생각이다.


아이들의 평화로운, 알아들을 수 없는 수다 소리와 함께 편안히 잠들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5. 횡단 열차에서의 첫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